하지만 태초부터 있던 불합리한 관습은 아마도 혁신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 같다. 누군가 정해놓은 불합리함이 관습이 되어버린 이상 누구도 관습의 권위에 반대할 생각조차 못한다. 그래서 많은 불합리함과 비효율성은 감히 언급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 언급하기 힘든 불합리함 중 하나를 꼽자면 '보고'이다.
전자결재라는 기능을 두고 왜 결재 전에 보고를 하고, 결재를 올리고 보고를 하고, 보고를 하고 실행을 하고, 실행을 하고 또 보고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어떤 사항에 대해 결정 과정까지의 소통을 위한 보고는 필요하지만 그 이후에 필요한 사항은 궁금한 사람이 시스템이 들어가서 찾아보면 되는 것이 아닐까?? 조선시대 유물인 제사조차 간소해지고 있는 마당에 보고에 들이는 공은 갈수록 치밀해진다. 돌아가신 조상님 보다 살아있는 임원님의 권위가 더 막강한 건 확실한 것 같다.
다른 직종도 그렇지만 특히나 제조업은 '경험'에 의한 판단이 중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오랜 기간 경험을 통해 정립된 선임의 직관과 문제 해결 방법은 결코 무시해선 안된다. 다만, '보고'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라 같은 내용을 4~5번씩 보고해야 하는데서 나오는 비효율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재밌는 건 임원 보고해야 할 사람은 팀장님이지만 자료는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6년간의 회사 생활에 3명의 팀장님을 거치며 알게 된 점은 리더가 방향만 가시적으로 잡아줘도 일이 반 이상 줄어든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런 것이다.
Case 1. 방향성에 대해 말로만 하고 초안을 만들어 보라는 것
Case 2. 방향성에 대해 초안을 본인이 직접 고민하고 시각화된 자료를 통해 실무진들의 의견을 요청하는 것
3명의 팀장님 중 두 분이 Case 1에 해당되셨고, 한 분이 Case 2에 해당되셨다.
회사 생활 중 가장 보람 없는 하루를 꼽자면 아마도 '갑자기 보고 자료를 만들라는 Order에 초안 작성/보고/수정/보고/수정을 반복하며 하루를 다 보내는 날'일 것이다.
Case2를 행해주신다는 것은 이런 불필요한 과정이 최소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은혜 그 자체다. 분명 같은 일을 하는데 팀장님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퇴근 시간이 평균 2시간 이상 차이가 났다. 회사생활에서 하루 2시간의 여유를 더 가질 수 있다면 이보다 큰 복지는 없다.
안타까운 점은 Case 1이라는 암묵적인 관습에 대해 누구도 반대 의견을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환경이 반복되면 실무진은 '허탈감'과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루 종일 열심히 쓸데없는 일을 했다는 '허탈감'과 이런 비효율성을 나는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이 그것이다.
우리가 정성껏 준비한 보고를 경청해 주시고, 정성껏 작성한 자료는 전자결재를 통해 올려놓았으니 한번 더 찾아봐주신다면 회사 일의 비효율이 반은 줄어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