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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Vet Apr 11. 2019

사랑 상실의 비극, <러브리스>

사랑이 부재하는 사회를 날카롭게 찌르다

※ 본 후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뭘까? 필자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은, 사회를 지탱하고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기둥이다. 사랑이 함께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다. 하지만 요즘 사회는 사랑을 잃어가고 있다. 타자에 대한 이해를 포기한 채 혐오하고, 이분법적 사고로 모든 것들을 나누며 어느 곳에서건 적을 만든다. 사랑을 잃어가며, 사회가 병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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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브리스>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주)

 가정이라는 사회는 그 어떤 사회보다 '사랑'을 기반으로 묶여있는 공동체이다. 부모가 사랑해서 가정을 꾸리고, 부모의 사랑으로 자식을 양육하기 때문이다. <러브리스>는 가정에서 그 사랑을 뺐다. 부모는 이혼을 하기로 한 상태이고, 자식은 둘 중 누구에게도 환대받지 못한다. 엄마인 '제냐'는 아들 '알료샤'를 향한 환멸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나마 아들을 신경 쓰는 것 같던 아빠 '보리스'도, 부부싸움을 하던 중 아들을 신경 쓴 이유가 직장 때문이었다는 것을 밝힌다. 부부싸움을 몰래 듣던 아들은 이 가정이 자신의 안식처가 아님을 확인하고, 입을 막은 채 소리 없이 오열한다. 그리고 아들이 집을 뛰쳐나가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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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브리스>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주)

 아들의 실종 이후, 부모의 모습을 비추는 것이 영화의 주된 서사이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웃기다. 아이가 실종됐지만 보리스는 상당히 평온하다. 제냐는 계속 핸드폰만 만지작거릴 뿐이다. 미아 수색 단체 직원이 아이에 관해 물어볼 때도 부모는 제대로 아는 것조차 없다. 또 둘은 이미 각자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있다. 보리스는 '마샤'라는 다른 여자와 교제 중이다. 심지어 마샤는 임신을 한 상태이다. 또 제냐는 '안톤'이라는 능력 있는 남자와 교제 중이다. 두 커플 다 육체적으로 서로를 탐하고, 보리스와 제냐는 각각의 애인에게 '이전 사람은 사랑하지 않았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두 커플은 다 행복해 보이지만 어딘가 수상하다. 마샤는 늘 불안해하며 사랑의 확신을 보리스에게 간구하고, 안톤은 타지의 딸을 그리워하고 또 외로워한다. 결국 모두 각자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사랑을 하는 중이다(이는 후에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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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브리스>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주)

 중간에 흥미로운 설정이 등장한다. 보리스를 비롯해 여러 인물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점. 기독교의 교리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인데, 그런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란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기독교인'이란 부조리함은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인 동시에, 기독교인으로서 내 안에 사랑이 존재하는지 성찰할 수 있는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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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브리스>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주)

 또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면, 이 영화의 연출에서 인상적인 부분이   다. 먼저 이 영화의 호흡은 상당히 길고 정적이다. 보통의 영화들은 사건의 진행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일정한 타이밍에 편집점을 잡고 다음 숏으로 넘어간다. 하지만 <러브리스>에서 필자가 편집점을 예측할 때마다, 영화는 숨을 조금 더 들이쉰다. 이런 긴 호흡은 관객이 감정보다는 상황에 집중하게 만들고, 나아가 인물들과의 거리감을 조성한다. 사랑이 없는 차디찬 영화에서 감정 이입의 여지마저 줄이는 것이다. <러브리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인물들 사이의 거리감도 만든다. 가장 단적인 예시는 안톤의 집이다. 안톤의 집 내에는 거울이 있다.

 위의 그림은 필자가 직접 만든 안톤의 집 내 장면의 모식도이다. 보면 안톤은 창가 의자에 앉은 제냐를 바라보고 있다. 이때 카메라는 안톤을 향하면서, 제냐는 화면 내에서 배제한다. 대신 거울에 비친 제냐의 상을 비춘다. 실제로 안톤과 제냐의 거리는 멀지 않고, 또 안톤은 제냐를 바라보고 있지만 화면 내에서 관객은 반대 방향을 보는 안톤과 거리가 있는 제냐를 보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이 방식 외에도 다양하게, 효과적으로 인물 간의 거리를 조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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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브리스>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이곳저곳 돌아다녀도 알료샤는 보이지 않는다. 흥미로운 점은 부모의 얼굴에 절실함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자 새로운 가정에 충실하며, 그 사이에서 아이는 관심의 바깥으로 밀린 것이다. 결국 이들이 아이를 찾기 위해 하는 모든 것은 '부모'란 타이틀에 걸맞은 보여주기 식 행위에 그칠 뿐이다. 결국 아이의 변사체가 발견되고, 제냐와 보리스가 직접 확인한다. 이 장면에서 둘은 오열하는데, 평소와 다르게 감정이 격하다. 부모로서의 일말의 양심이 살아난 것일 수도, 아니면 보여주기용 과장일 수도 있다. 영화는 그 선택을 관객에게 맡기지만, 필자의 눈에는 후자로 보인다. 사실 알료샤의 전단지가 현재까지 붙어 있어 알료샤가 살아 있지 않냐고 말하는 관객도 있다. 이것도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지만 필자의 의견은 다르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전단지는 부모가 죄책감을 덜기 위한 반창고와도 같다. '우린 이만큼 노력했어, 너희가 비난할 자격 있어?'라는 면죄부를 거리 곳곳에 붙여놓고 자위하는 수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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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브리스>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주)

 영화는 결말에 몇 년 후를 보여준다. 제냐와 보리스는 각자의 가정에서 다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마샤는 엄마(보리스의 장모)와 이혼을 논의하는 것 같고, 보리스는 마샤와의 아이를 막 대한다. 육체적으로 정말 뜨거웠던 제냐와 안톤은 차디차게 식어버렸다. 이 두 가정을 나란히 보여주는 결말에서 영화가 집중하는 사물이 있는데, 바로 TV이다. 사실 영화는 중간중간에 TV 뉴스를 조명한다. TV에서 흘러나오는 내용은 '우크라이나의 내전'이다. 우크라이나 반군을 러시아에서 비밀리에 지원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몇 년이 지난 후에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폭격했다는 이야기가 TV에서 흘러나온다. 결국 영화 속의 사랑이 없는 모든 인물들은 '러시아'라는 나라의 표상이다. 가정이라는 사회를 통해 러시아라는 사회로 시야를 확장하며 현 세태를 비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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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브리스>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주)

 결말부에서 안톤과 TV를 보던 제냐는 'RUSSIA'가 크게 박힌 트레이닝복을 입고는 러닝머신 위에서 달리기 시작한다. 제냐는 얼마 뛰지도 못하고 금방 지쳐버린다. 러닝머신 위에서 달리다 지치는 제냐는 옷이 말하듯 곧 'RUSSIA' 그 자체다. '조만간 러시아는 정체를 겪을 것'이라고 감독은 말한다. 이렇게 사랑이 없다는 것은 비단 러시아만의 문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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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브리스>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주)

 영화의 시작과 끝은 대구를 이룬다. 영화는 눈 덮인 숲 하나를 조망하며 시작한다. 흰색과 빨간색이 교차된 안전선이 바닥에 버려져있고, 알료샤가 그걸 나뭇가지에 묶어 리듬체조 리본 마냥 가지고 논다. 그러다 숲의 큰 나무 하나에 알료샤가 그 안전선을 걸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영화의 가장 끝에는 그 숲이 다시 등장한다. 그리고 나무에 걸려있는 그 안전선을 다시 비추며 영화가 끝난다. 이 안전선은 관객을 향한 경고의 선이다.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관객에게 '영화 속 이 인물들과 같아지면 안 된다'라고 말하는 알료샤의, 나아가 영화의 경고이다. 현재 우리의 가장 큰 적은 우리의 이기심이라고, 이 영화는 말한다. 과연 여러분은 떳떳한가?



사랑이 부재하는 사회를 날카롭게 찌르다
★★★★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한 후기입니다※




- CineV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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