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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Vet Feb 20. 2020

100년 전, 1600명을 구한 단 한 사람

1917년 4월 6일의 위대한 여정을 담은 영화, <1917>

▲ <1917> 포스터 ⓒ(주)스마일이엔티

 <1917>의 극장 개봉명은 영화가 다루는 사건의 발생 연도인 '1917'이지만, 실제 스크린에서 보여주는 시간은 보다 구체적인 1917년 4월 6일이다. 영화는 금요일부터 토요일 아침으로 이어지는 시간을 담고 있는데, 즉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사건의 시작이 아닌 끝이다. 시작을 주목한다는 것은 삶과 죽음에서 삶을 바라보겠다는 선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물이 초래한 결과보다 그 동기를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 샘 멘데스 감독의 모습 ⓒ(주)스마일이엔티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최근에 봉준호 감독을 통해 유명해진 스콜세지 감독의 말이다. 이번 영화를 보면서 떠오른 말이 조금 비슷했는데,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위대한 것이다’라는 문장이었다. 이 영화는 샘 멘데스가 할아버지인 알프레드 H. 멘데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한 개인의 이야기, 전쟁 속에서 1,600명의 목숨을 구한 이야기, 어쩌면 이는 신화에 가깝다. 원 컨티뉴어스 숏을 사용하며 리얼리즘을 표방하면서도, 위대한 신화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영화에는 신화적 이미지가 곳곳에 스며있다.


▲ <1917> 스틸컷 ⓒ(주)스마일이엔티


 영화 속에서 가장 많이 떠오른 것은 예수님의 이미지이다. 예수님의 이미지는 스코필드 주변을 배회한다. 스코필드는 철조망을 넘던 도중 철조망에 손바닥이 찔리고(구멍이 생기고), 죽은 자의 몸에 난 구멍에 손을 집어넣는다(도마가 예수님에게 그랬듯). 폭발에 휩쓸려 먼지로 인해 눈이 보이지 않다가 눈을 씻어내며 보이게 되고(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결정적으로 죽음 속에서 부활한다. 부활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영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순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영화는 원 컨티뉴어스 숏을 표방하지만, 사실 카메라가 끊기는 지점이 단 한 군데에 존재한다. 자그마한 종탑 같은 곳에 있던 적군을 쏘기 위해 방문을 여는 순간, 동시에 총을 쏘고 스코필드가 계단으로 굴러떨어지는 장면이다.


▲ <1917> 스틸컷 ⓒ(주)스마일이엔티


 그 후에 화면은 몇 초간 암전이 된 후, 같은 위치에서 카메라가 시작되지 않고 스코필드의 얼굴을 비추며 시작된다. 스코필드의 얼굴에는 물방울이 떨어지고, 그 물방울로 인해 잠에서 깬다. 여기서 가장 이상한 장면이 등장한다. 스코필드의 얼굴은 깨끗하며 뒤통수에서만 피가 흐르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총알은 빗겨맞고 계단에 구른 것이겠지만, 필자는 영화의 묘사가 ‘총알이 관통했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총알이 관통해서 뒤통수에 피가 흐르지만, 그는 죽지 않은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는 죽음 후에 부활한 것이다.


▲ <1917> 스틸컷 ⓒ(주)스마일이엔티


 그렇다면, 이런 초현실적 묘사까지 동반하며 스코필드를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이끌어야 했던 이유는 뭘까? 이는 어쩌면 앞서 말한 인물의 동기가 가장 큰 이유가 되지 않을까. 사실 이야기의 시작으로 돌아가면 전령은 혼자가 아닌 둘이었다, 블레이크와 스코필드. 초반부에 묘사된 두 인물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블레이크는 이 임무에 형의 목숨이 달려 있다. 하지만 스코필드는 이 임무에서 어떠한 뜻도 없다. 필사적인 블레이크와 이유가 없음에도 블레이크와 1,600명을 향한 책임감으로 움직이는 스코필드, 이 두 인물로 영화는 극을 이끌기 시작한다.


▲ <1917> 스틸컷 ⓒ(주)스마일이엔티


 이야기가 진행되던 중, 블레이크가 죽는다. 사제를 준비하다가 먹고 살기 위해 입대한 그는 추락한 독일군 비행기에서 조종사를 구하지만, 아이러니하게 그 독일군 병사로 인해 죽는다. 이때 스코필드는 블레이크의 의지를 이어받으며, 일개 전령에서 구원자로 거듭난다. 베어진 나무들, 죽음이 가로막는 길을 전우들과 함께 건너고 종탑에서 죽음을 경험한다. 부활 후에는 죽음의 공간처럼 보이는 에쿠스트를 지난다. 에쿠스트에서 또 하나의 경이로운 순간이 서려 있는데, 바로 생명을 마주하는 순간이다.


▲ <1917> 스틸컷 ⓒ(주)스마일이엔티


 독일군으로부터 도망치는 도중, 스코필드는 숨을 곳을 찾아 들어간 집에서 아이와 프랑스인 여성을 만난다. 스코필드는 여인에게 목적지로 향하는 길을 물어보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 휴식을 취하는 동안 여인에게 음식을 전달하고, 자신에게 생명수와 같았던 우유를 아이에게 전한다. 이때 여인이 아이가 있냐고 물어보고 스코필드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시를 하나 읊는다. 그 후에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오고, 스코필드는 의지를 얻은 듯 여정을 이어나간다.


▲ <1917> 스틸컷 ⓒ(주)스마일이엔티


 독일군에게 계속 쫓기다 물에 뛰어든 스코필드는 강류에 휩쓸려 다닌다. 겨우 뭍에 다다를 때쯤 그의 머리 위로는 체리 나무의 꽃잎이 흩날린다. 우리는 이미 체리 나무를 만났다. 블레이크가 그 가치를 알아봤던 체리 나무들은 이미 꺾였고, 그 죽음의 기운 앞에서 블레이크는 흩날리는 불씨를 보며 세상을 떠났다. 정적인 대지에서 죽음을 맞이한 블레이크와는 다르게, 스코필드는 흐르는 강물에서 숨을 이어간다. 그의 앞에는 시체들이 떠다님과 동시에 살아있는 꽃잎이 흩날린다. 이렇듯 영화는 계속 생사의 조응을 통해 그 순환을 비춘다.


▲ <1917> 스틸컷 ⓒ(주)스마일이엔티
▲ <1917> 스틸컷 ⓒ(주)스마일이엔티


 이런 조응은 흥미롭게도 항상 대립쌍으로 존재한다. 죽은-살아있는 체리 나무, 독일군-여인과 아기, 쇠쪼가리(훈장)-물(와인과 우유), (블레이크 위에 흩날리던)불씨-(스코필드 위에 흩날리던)꽃잎처럼. 하지만 여러 대립쌍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된 두 장면이었다. 영화에서는 항상 인물들을 3인칭으로 바라보지만, 딱 두 번 카메라에서 인물을 완전히 배제한다. 첫 번째는 스코필드가 쓰러졌다 일어난 후 불타는 에쿠스트를 비출 때, 두 번째는 뭍으로 올라온 스코필드가 크루아지유 숲으로 나아갈 때. 이 두 장면은 불타는 마을-숲을 통해 죽음-생명의 대립쌍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인물의 동선을 통해 더 확장된 이야기를 전한다. 불타는 마을을 비춘 뒤에는 스코필드가 카메라보다 아래에서, 작게 멀찍이 스크린 안으로 들어오며 죽음 앞에서 작아짐을 보여준다. 반면 숲을 비춘 뒤에는 카메라의 옆에서 가까이 스크린 안으로 들어오며 생명과 동행하고 있음을 비춘다.


▲ <1917> 스틸컷 ⓒ(주)스마일이엔티


 이렇게 <1917>은 카메라를 통해 계속 관객에게 이야기한다. 카메라가 인상적인 지점은 이뿐이 아니다. 카메라는 항상 스코필드의 의식 혹은 지각과 함께 한다. 앞서 말했듯 영화는 과감하게 스코필드의 추락과 함께 컷을 끊는다. 스코필드의 의식과 함께 시간을 함께하겠다는 영화의 선언처럼 다가온다. 또 블레이크가 죽는 장면을 (스코필드가 보지 못했기에) 카메라가 비추지 않고, 에쿠스트에서 스코필드가 바라본 뒤에야 토하는 독일군에 초점을 맞추는 등 카메라는 항상 스코필드의 인지와 함께한다. 단순히 시간만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 또한 함께하는 것이다.


▲ <1917> 스틸컷 ⓒ(주)스마일이엔티


 또 인물들과 항상 함께하면서, 카메라-인물 간 시선의 높이 차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이때 카메라가 인물을 바라보면 인물은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지상-하늘의 경계에 위치한다. 이 대립쌍은 또다시 생-사의 관계로 확장되며 관객들에게 경이감을 전달한다. 그리고 이런 감정들을 가장 절정으로 끌어올리는 장면이, 바로 에쿠스트 숲을 지나 매켄지 중령을 향해 나아가는 클라이맥스이다.


▲ <1917> 스틸컷 ⓒ(주)스마일이엔티


 스코필드는 하얀 모래가 눈에 띄는, 길고 복잡한 참호를 지나며 매켄지 중령을 찾아간다. 1,600명의 돌격은 얼마 남지 않았고, 전장에는 전운이 돈다. 시간이 임박할수록 관객과 스코필드는 초조해지고 참호에는 폭격이 다다른다. 진군이 코앞에 닥친 그때, 스코필드의 표정에는 그 무엇도 남지 않은 채 오직 결의만이 남는다. 진군이 시작될 때 모든 병사가 횡(橫)의 방향으로 달려가는 그 이동과 외로이 종(縱)의 방향으로 달리는 의지, 모두의 생(生)을 향한 의지가 충돌한다. 그리고 관객은 그 이동과 의지의 충돌을 생사의 경계(지상-하늘)에서 목도하며 하나의 총체적 이미지를 체험한다. 이런 이미지의 체험은 최고의 경이이자, 하나의 영화적 체험이다.


▲ <1917> 스틸컷 ⓒ(주)스마일이엔티


 임무를 마침내 수행하고 모두를 살린 스코필드는 블레이크의 형을 찾아 나선다. 블레이크의 형을 만나 유품을 전하고, 그의 죽음을 알린다. 모두의 삶을 전했지만, 개인의 죽음을 전해야 하는 아이러니 속에서 스코필드는 생명의 상징과도 같은 나무로 향한다. 그는 나무에 기대 눕고, 품속에서 사진을 꺼낸다. 질문에 답하지 않았던 딸의 존재를, 영화 내내 보여주지 않았던 아내의 존재를 사진으로 관객에게 보여준다. 사실 이미 그는 그 질문에 답을 했다. 질문 뒤에 읊었던 시는 'The Jumblies'라는 시로, '에드워드 리어'라는 '아동'문학가의 작품이다. 그는 자신이 부모임을 이미 증명했지만, 영화는 끝에 가서야 그 사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아내의 사진 뒷면에는 '살아 돌아오라'라는 아내의 글귀가 적혀있다.


▲ <1917> 스틸컷 ⓒ(주)스마일이엔티


 이 모든 것을 마지막에 보여주는 까닭은 결국 공적 동기가 성취된 뒤에야 블레이크 형의 생사 확인이라는 사적 동기의 성취가 가능하고, 생존이라는 내적 동기의 성취가 가능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전쟁은 개인이란 존재를 철저히 짓밟지만, 시대의 압박을 끝내 이겨내고 개인으로서 오롯이 존재하는 힘이 스코필드에겐 있었다. 그가 마지막에 눈을 지그시 감을 수 있던 그 힘은 그 내적 동기, 가장 강하고 내밀했던 동기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닐까. 결국 영화는 끝에서 이 모든 것을 스코필드의 이름으로 함축한다. 윌리엄, 윌(Will).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의지(Will). 한 사람의 숭고한 의지가 생명의 길로 이어지는 그 기적의 순간, 1917년의 4월 7일이다.




- CineV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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