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문철 Jan 09. 2019

"포스트휴먼", 로지브라이도티

한줄요약 : 조에평등적 주체성을 통한 포스트 휴먼

로지 브라이도티, 포스트휴먼

12월의 기나긴 금독 기간을 지나고 다시 책을 손에 들었다. 오랜만에 읽는 책은 머리를 살짝 아프게 하고 눈을 침침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금독기간을 지내면서 책이라는 게 읽는 습관을 들이는 건 어려워도 책 안 읽는 습관은 쉽게 만드는구나 라는 걸 느낀다.


책을 읽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는 연말에 할게 많기도 하고 나의 대부분의 에너지를 책에 쏟아 내기 때문에 주변에 집중할 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책을 손에서 떨쳐내야 했다.


처음에는 책을 읽지 않겠다고 하는 게 쉽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왜냐하면 외출하고 집에 돌아와서 책상에 앉는 것은 매번 하던 일이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책을 펼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책을 안 읽는 건 너무나 쉬웠다. 그냥... 핸드폰을 보면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가게 된다. 참 신기한 일이다. sns는 많은 시간을 나에게 요구했고, 나는 sns가 요구하는 만큼 아니 어쩌면 인심 좋게 몇 시간은 더 주게 되었다.


지난 학기 수업 교재로도 사용했던 이 책은 포스트휴먼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우리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근대적인 시각에 대하여 맹렬히 비판하고 있다. 휴머니즘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인간'규정을 의미한다. 브라이도티는 그것이 너무나도 남성주의적이고, 이성 중심이었으며, 타자를 만들고 배제한다고 지적한다.


인간에 걸맞은 특정한 계층을 설정하다 보니 그에 해당하지 않는 계층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역사적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휴머니즘에 반대하면서 나온 것이 바로 반 휴머니즘의 운동이다. 근대적인 시각의 영향을 부정하지만 그러기 위한 어떤 근대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반 휴머니즘은 휴머니즘의 차별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지만 여전히 주체성에 대해서는 인간 중심적인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브라이도티가 말하고자 하는 주체는 결국 인간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조에'라는 새로운 개념으로부터 나오는데 생명력은 인간에게 제한되는 것이 아닌 생기론적인 '기'에 있기 때문이다. 브라이도티가 말하는 이런 '기'는 관념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생기론적이고 유물론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과학적 개념에서 유물론을 표방하면서도 그것을 어떤 '기'의 관점, 생기론의 모습에서 본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추가로 생기론은 사실 기독교적인 의미를 담지하고 있는 용어이다. 왜냐하면 생기를 누군가 불어주었다. 어디서 생기를 받았다는 관점에서 초자연적인 개입과 창조적 행위에 대한 근본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라이도티는 이것을 형이상학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자들이 '조에'의 관점에서 동등하다. 평등하다는 말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 주체에서는 누군가 배제되거나 차별당하는 구조가 생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근대 휴머니즘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비도덕함과 비인도적인 모습을 브라이도티는 '조에'적 개념으로 해결하고 싶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 중심의 탈피가 필요하다.


오해하지 않아야 할 부분은 바로 '트랜스 휴머니즘'의 부류이다. 인간 향상이라 불리는 이 개념은 과학발전에 따른 인간의 유전적 향상 능력적 향상을 의미한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서 인간에게 불필요한 또는  성능이 낮은 것을 향상하거나 높일 수 있다면 인간은 그 자체로 뛰어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포스트휴먼은 트랜스 휴머니즘을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브라이도티가 지향하는 바는 아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하게 되는 기술발전의 향상에 초점을 둔다는 것은 무엇인가 객체로 두고 주체 설정에 있어서 들뢰즈와 같이 "타자-되기"의 오류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들뢰즈를 따라서 브라이도티는 이러한 '타자-되기"에 방향을 둔다. 그러기 위해서는 포스트휴먼에 필요한 것이 바로 페미니즘적인 시각이다. 근대 휴머니즘의 시각에서 발생한 차별화의 문제는 결국 근대적 개념으로 해결할 수 없다. 따라서 포스트휴먼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주체 설정의 파괴가 필요한 것이다.


브라이도티는 휴머니즘의 설정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비판하며 포스트 휴먼을 지향하기 위한 주체를 생기적 유물론으로서 파악한다.  알튀세르나, 푸코가 지속해서 말해온 이데올로기의 개념을 브라이도티가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선택하는 것은 굉장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평점 : ★★★ (그냥저냥한 수준)

매거진의 이전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애거서크리스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