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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문철 Apr 20. 2020

판넨베르크의 아무튼 이것저것 많이 담은 패키지 신학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조직신학3"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조직신학3


우선 진짜 두껍다. 1권과 2권도 겨우겨우 읽었었는데 3권은 그보다 훨씬 더 방대하고 어렵고 귀찮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냥 아무생각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과 동일하다. 아무튼 뭔가를 했는데 아무 결과가 없는 우리네 인생처럼 읽었는데도 읽지 않은 느낌이다. 


약간 양자역학에서 서술하는 양자중첩과 같은 느낌이다. 봤는데 보지 않았다. 분명 읽었는데 읽지 않았고 했는데 안했다. 살아있는데 죽어있다. 그리고 있는데 없다. 중첩이 되어있는 양자처럼 우리네 인생은 모순과 같은게 아닐까 


아무튼 성령과 교회, 예정과 역사, 종말론을 담고 있다. 판넨베르크의 삼위일체적 진술이 하나님의 행위에 관련된다고 한다면 당연히 성령론의 위치는 부각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그런 점에서 성령은 하나님의 경륜을 더욱 완성시킨다. 


그런 점에서 성령의 활동은 교회에 나타난다. 판넨베르크의 말에 따르면 영의 부어짐이 현존하는 곳이 바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영의 부어짐은 필연적으로 희망을 도래한다. 따라서 종말론적 구조가 현재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며 우리 인간의 종말은 희망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의 사역은 창조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영의 사역을 완성한다. 하나님의 영이 복음 안에서 복음의 선포를 통해 현재하는 특수한 방식은 교회의 예배적 삶을 통해 조명되며, 믿는 자들의 마음을 채운다.
 -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조직신학3" 중에서 - p.28


따라서 하나님의 영이 부어짐으로 도래한다는 것은 결고 신앙이 교회만의 특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대한 영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사회와 연관을 가지게 되면서 교회라는 단어가 단순히 '가시적인 교회'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건물로서의 교회가 아니다. 


이러한 교회, 하나님 나라를 담고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근거로 한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그 안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며 그 공동체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순종하는 백성이 된다. 따라서 사회적 영향을 받는 교회는 예언자적 영성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분명 교회는 사회와 닿아있는 지점이 있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단순히 동일시되지 않는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는 어떤 불완전한 형태로 파악되지도 않는다. 물론 교회는 옛 계약의 하나님 백성처럼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 안에서 서 있고, 이 관계는 자신의 현존재를 구성한다.
-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조직신학3" 중에서 - p.70


그런 점에서 교회 공동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질문이 생기게 된다. 그것은 개인과 예수 그리스도의 연합 및 믿는 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의미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은 삼위일체 경륜을 완성한다. 그 지점에서 오히려 개인은 자신의 현존재를 감각하는 것이다.


그러한 개인과 예수 그리스도의 연합은 개인주의를 탈피한다. 따라서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며 예수가 자신의 제자를 모은 것처럼 공동체는 연합을 이루게 된다. 그것이 교회가 된다. 따라서 성서에도 증언되는 것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된다. 


루터의 사상은 종교적 개인주의가 아니라 바로 '영적 공동체'로서의 공동체적 현실을 포함하고 있다.
-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조직신학3" 중에서 - p.215


이러한 영적 공동체는 자연스럽게 '믿음'을 요구한다. 흔히 교회 전통에 있어서 강조되는 것은 믿음, 희망,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지점 속에서 영의 기본적인 구원 작용에 대해 언급한다. 그것이 바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음과 행위의 연관성 속에서 판넨베르크는 특별히 하나님의 영에 대한 활동을 더욱 강조하는 편이다. 가시적인 교회에 있어서 하나님의 활동을 느낄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세례와 성만찬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적인 삶을 산다는 말은 이러한 은혜의 수단에 참여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흔히 웨슬리가 말하는 것처럼 세례와 성만찬은 은혜의 수단이다. 믿음이 없거나, 믿음을 유지하기 힘들 때 우리는 은혜의 수단에 참여함으로써 다시금 믿음을 회복할 수 있다. 이러한 지점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판넨베르크게에 있어서 하나님의 활동성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삼위일체의 활동이며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드러나는 순간이지 않을까 싶다. 


세례를 통한 거듭남 혹은 인격의 새로운 구성은 세례받은 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래서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결합된다는 내용을 가지며, 그 결과 그 혹은 그녀의 인격 존재가 지속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그것도 구체적으로 아버지께 대한 예수의 아들 관계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구성된다는 내용을 갖는다.
-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조직신학3" 중에서 - p.390


그리스도인은 예수와 함께 참여한다. 그것은 세례를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셰레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세계가운데 드러나게 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신 탈중심성에 참여해 세계개방성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교회에 있어서 가장 문제점은 바로 예정과 소명의 부분이다. 이 지점은 정말 예정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큰 지점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판넨베르크고 이 지점을 많은 장을 할애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물론 고전적인 예정론을 설명하면서 그 비판점을 짚고 넘어간다. 고전적인 예정론의 가장 큰 딜레마는 바로 선택을 받은 사람과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스스로가 예정되어 있다고 알 수 없는 인간은 결국 삶의 소명에 기대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이 나를 선택했을 것이라 믿으면서 하나님이 주신 삶을 따르려고 하는 형태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의 예정을 하나님의 통치의 맥락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는 예정이라는 것이 결국 종말론적 형태에서 드러나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를 살아가는 역사 가운데 현존재는 예정을 향해 가는 종말론적 흐름 속에서 자신을 기투하게 된다.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의 목표인 인간들의 공동체의 결정적인 형태는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공동체 안에서 비로소 나타날 것이다.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예정 행위는 아직 그 목표를 향하는 도상에 있지 않은 인간들을 향한다.
-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조직신학3" 중에서 - p.723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는 곳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는 곳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곳이다. 따라서 교회는 가시적인 교회, 건물로서 교회로 여겨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로 여겨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신학은 교회에 봉사해야 한다는 말은 이런 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정된 종말을 미리 선취한다. 그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자기계시로 드러나는 것을 말해주면서 또한 부활의 역사가 그것을 보여주며 하나님의 영이 그것을 보증한다. 따라서 교회에 소속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런 지점을 본다면 웨슬리의 성화개념을 어느정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언제나 성화의 과정을 거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 멋지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희망은 오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성취된다. 그것은 곧 죽음의 신학에 있어서 현존재가 경험하는 죽음이라는 불안도 결국 희망으로 재전환된다는 것이다. 물론 현존재는 자신을 세계 가운데 기투함으로써 죽음으을 인식한다. 


그러나 그 죽음이라는 지점은 인간에게 언제나 불행으로 다가온다. 그건 절망에 가깝다. 그러나 키르케고르가 말한 것처럼 죽음에 이르는 것은 육체적 질병이 아니라 오히려 절망이라고 했던 것처럼 판넨베르크는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변한다고 말한다.


확실히 그것은 희망을 가져다 준다. 그것은 죽음 즉 인간이 직면한 불행과 악이라는 관점에서 그것을 구원의 역사를 통해서 희망으로 완성된다는 점에서 극복되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이 처한 세계 가운데 불행과 악은 더이상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지점이 항상 비판받는 부분은 현실성일 것이다. 판넨베르크 역시 역사라는 가장 크고 넓은 관점을 가지고 불행과 악을 설명하기에 그리고 그 역사는 오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희망을 가지게 된다는 세계 개방성이라는 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지금 당장 악을 경험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그 지점에서도 판넨베르크는 대답할 것이다.


미래를 선취하시는 하나님에게서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이며 또한 그 가운데 고통을 받은 파송된 예수라는 하나님의 아들과 그가 고통가운데서 끝이 나지 않고 성령의 능력으로 인해 하나님 우편에 앉게 되었다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측면에서 삼위일체의 활동성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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