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문철 Apr 25. 2020

진짜 신학교에서 이걸 교재로 써야 하는데

칼 바르트, "설교학원강"

칼 바르트, 설교학원강


이야! 이거를 학교에서 교재로 써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언젠가 신학교 학부생 시절 설교학을 배웠는데 그때 교재를 이 책으로 했다면 정말 목적과 내용과 수준이 맞는 삼위일체를 이루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상한 몸-말 설교 이 딴 거 말고


바르트의 설교학 개론은 정말 설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방법론적인 것도 담고 있으면서 설교가 무엇인가라는 조직신학적인 담론도 가지고 있다. 그런 지점에서 정말 알찬 책이 아닐까 싶다.


설교는 하나님의 계시를 근거로 한다. 절대 타자인 하나님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통로는 극히 제한적이다. 따라서 공동체에게 선포되는 설교는 그 가운데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드러내게 한다. 그런 지점에서 설교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신학자들은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성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근거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지점을 본다면 왜 칼 야스퍼스가 바르트와 논쟁을 했는지 알 수 있을 듯하다.


설교는 일어나고 있는 계시이며, 그와 같은 것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따라서 이 전제 아래 무조건 세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 칼 바르트, "설교학원강" 중에서 - p.50


그렇다면 설교는 어디서 선포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교회다. 우리는 앞서 이 책 이전에 판넨베르크의 책을 통해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현실적으로 선포, 즉 설교가 일어나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 바로 가시적인 교회, 건물로서의 교회가 아니겠는가


그런 지점에서 바르트는 가시적 교회를 중요시 여기면서도 또한 비가시적 교회에 대한 입장을 밝힌다.


교회란 물리적이고 역사적인 것이며, 현실적이고 가시적인 몸이지만, 또한 동시에 그리스도의 신비에 싸인 몸으로 불가시적인 것이다.
- 칼 바르트, "설교학원강" 중에서 - p.50


따라서 설교는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통일성이 있다. 설교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드러내 준다. 따라서 삼위일체적 하나님이 교회 가운데, 예배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이다. 그런 지점은 우리가 설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를 잘 보여준다.


사실, 설교시간에 조는 사람이 많이 있지만... 우리는 그러면 안된다. 설교 가운데 선포되는 예수 그리스도는 설교 자체에 하나님의 영을 깃들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설교가 목사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에수를 전해야 한다는 점에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판넨베르크의 아무튼 이것저것 많이 담은 패키지 신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