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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문철 May 06. 2020

들음은 행함을, 행함은 존재를

케빈 밴후저, "들음과 행함"

케빈 밴후저, 들음과 행함 


왜 제자도가 중요한가 

밴후저의 논리는 매우 탁월하다.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들음과 행함은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웨슬리 설교집을 보고 있는데 거기서 밴후저와 같은 의미를 말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과 참된 그리스도인은 행함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이방인의 신앙은 '들음'에서 멈춘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들음에서 행함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언젠가 우리 교회 목사님께서 주일 설교를 '부르심에서 보내심'으로 전하신 적이 있다. 예수의 제자들은 부르심을 받은 것에서 멈추지 않고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부르심은 모든 인간을 향해있다. 그러나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보내심을 받는 자는 많지 않다는 점이다. 


따라서 밴후저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진정한 들음에는 행함이 포함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제자도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들음과 행함에 관해 말씀하실 때 권위와 지혜와 자유를 염두에 두셨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물의 본질에 따라 행동하며,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에 따라 행동한다는 의미다.
- 케빈 밴후저, "들음과 행함" 중에서 - p.85


신앙은 행동을 이끈다. 그런 점에서 계시는 확실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전통적인 신학에서도 부정신학이라는 개념이 있기에 우리가 개념화하는 신이 결코 절대적 신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신이 본 것에 대한 확실함을 이끌어 내어 핸동을 가능하게 한다. 


물론 이러한 지점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성경적 권위'라고 할 수 있다. 흔히 바르트를 비판하는 지점이 바로 계시 실증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의 행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가능하다면 그것이 계시라고 말할 수 있는 지를 성경이라는 계시를 통해 검증해봐야 할 것이다. 




제자도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런점에서 제자도의 중요성은 교리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알랭드 보통의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에서는 지극히 종교의 세속성을 보여준다. "교리 없는 지혜"라는 주제로 말한다는 것은 교리가 더 이상 필요 없으며 종교가 주는 이점은 교리가 아닌 종교성이라는 지점이다. 그러나 케빈 밴후저는 이러한 입장을 매우 반대한다. 


그리스도를 배운다는 것은 성경을 그분의 위격과 사역에 대한 증언으로 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바르게 읽기 위해서는 사도적인 전통의 보고인 교리를 배워야 한다.
- 케빈 밴후저, "들음과 행함" 중에서 - p.111


이런 지점에서 본다면 교리를 폐지하고자 하는 모든 운동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퀴어신학, 젠더신학은 부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닐까 싶다. 물론 밴후저가 그렇게 말한건 아니고 내생각인데 내가 부정한다는 건 아니고 


제자도는 앞서 말한 것처럼 교리를 중심으로 세워진다. 즉 제자도를 형성하기 위한 교리라고 할 수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말처럼 "행위와 존재"가 긴밀한 연관이 있다면 그것은 들음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들음은 행함을 가능하게 하고 그러한 행함은 존재를 말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존재는 바로 행함에 있는 것이다. 물론 행위를 통한 구원을 언급하자는게 아니다. 밴후저도 마찬가지로 오직 성경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하고 있다. 


밴후저의 제일 신학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교회는 말씀의 피조물로서의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본질은 말씀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 가운데서 제자도가 형성되는 것이다. 


교회의 핵심은 인간이 종교적인 동작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핵심은 성령이 주시는 믿음의 선물을 통해 말씀이 듣는 이들을 그 말씀의 영토 안으로 불러 모으는 것이다. 
- 케빈 밴후저, "들음과 행함" 중에서 - p.145


그런 점에서 복음주의 신학이라는 것은 복음주의자가 하는 신학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복음과 일치된 신학을 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이 지점을 이해하기엔 어려운 것이 없다. 다만 신학을 정치적 개념으로 여긴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복음주의자가 하는 행동이 복음과 일치하다는 개념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들은 다소 경계해야 할 부분은 맞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과 일치된 신학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분명 신학생으로서 읽어야 할 책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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