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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문철 May 10. 2023

어려움 속에서 윤리를 말하는 것

디트리히 본회퍼, 윤리학 

기독교 윤리학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 

1. 윤리학을 진술한다는 의미에 대해서 

신학교를 다닐 적, 언젠가 수업 시간에 이런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는 윤리적 행동과 비종교인의 윤리적 행동의 차이다. 

우리야 물론 믿음을 전제로하니까 믿음의 결과는 선한 행동 또는 확장된 믿음을 생각하겠지만 비종교인의 윤리적 행동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사실상 뭐 기독교인이야 믿음이 우선 되니까 믿음에 따른 윤리적 행동의 의미가 더욱 중요하겠지만, 비종교인의 비신앙에 근거한 윤리적 행동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질문이였던거 같다. 아무래도 윤리적 행동을 믿음의 결과나 열매로 생각한 고정관념이 자칫 비종교인의 윤리적 행동에 대한 의미를 착오한게 아닐까 살포시 생각해보지만, 아무튼 하고싶은 이야기는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윤리학과 철학적 관점에서의 윤리학에 대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본회퍼 책이라면 당연히 분석리뷰를 쓰고 싶었는데, 사실 아는 것도 없고 남는 것도 없었기에 간단리뷰로 쓰기로 결정했다. 기독교 윤리학과 철학 윤리학의 가장 큰 차이점은 답이 정해져 있냐, 아니야의 차이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윤리학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향한다.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키고 있는가에 대한 판단으로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피조물 가운데 실현되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를 비롯한 주체적 윤리의 기초와는 확연하게 다른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윤리의 기초는 실천이성의 주체인 인간에 놓여있다. 그리고 칸트는 그러한 인간을 굉장히 자율적으로, 행위 법칙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실천이성의 주체인 인간은 우리 자신의 행위 법칙을 스스로 수립한다는 이념에 서있는 것이다. 그러나 본회퍼의 윤리학은 항상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윤리를 행하는 인간 역시 그리스도와 하나를 추구하는 인간이라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이야기를 신비주의적인 합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인간에게 현실이 하나인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는 서로 하나다. 신비주의적 합일은 둘 중에 하나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만 본회퍼가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현실을 의미한다. 


아무튼 한번 더 읽어본다면 더욱 자세한 리뷰를 할 수 있을 거 같다서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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