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적 관점에서의 인간학, 이 책을 사려고 마음 먹었을 때 책의 목차가 큰 부분을 차지했었다.
아무래도 이 책은 칸트가 비판철학의 최고조로 올랐을 때, 대학에서의 인간학 강의를 모아서 취합한 것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윤리형이상학의 내용이 축약되어 있다.
칸트를 좋아하기도 하고 열심히 읽어본 사람으로써 내용을 요약한 본이 있고 축약한 칸트 책이 있다면 너무 좋을 것이라 생각하고 당연한 마음으로 책을 구매했다. 실제로 책에서 근간이 되는 3대 비판서의 내용을 다루기도 한다.
근데 다루기는 하는데 그 뒤가 사실상 오늘날 이해하기는 어렵다.
칸트 책을 읽고 자세하게 리뷰를 써놓으면 분명 도움이 될 테니까 그럴 마음으로 읽었는데 다 읽고나니까 사실상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만약에 한 줄로 평을 한다면 칸트도 관상에 대해서 관심이 있을 줄은 진짜 몰랐다.
칸트가 말하는 자신의 논리대로 풀어서 설명하는 관상...되게 흥미롭기는 하지만 순수이성비판 만큼의 큰 영향력이라던가 깨우침은 덜하다. 물론 관상의 의미가 오늘날에 그저 재미로만 의미가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칸트의 3대 비판서는 단순히 재미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인식에 대한 혁명을 불러오기에 그 둘의 차이가 있다고 본다.
간단하게 이야기 하자면 칸트 시대의 인간학은 굉장히 스콜라주의적이였다. 다시 말하자면 형이상학에 가까운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존재자와 본질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의 본질에 관해서 설명하는 내용이 주로 이루었을 것이다. 그런 시대 속에서 칸트는 인간 그 자체를 바라보면서 인간이 가지는 쾌와 불쾌, 물론 여기서 판단력 비판과 같은 공동감각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에 나름의 요약은 들어간다, 아무튼 그런 감정과 감각들로 인간을 풀이하고자 한다.
따라서 형이상학적이고 스콜라주의적인 인간에 대한 설명에 대항해서 인간이 느끼는 감정과 이성적 사유를 말하고자 하니 분명 실용적 관점은 맞을 것이다. 독일어로는 pragmatisch라고 하던데 프래그머티즘이라는 실용주의를 말할 때 그 의미가 맞겠다. 물론 원어는 그리스어겠지만 아무튼
프래그머티즘이라는 실용주의는 우리가 잘 알고 체험하고 있는 실용주의다. 쓰기에 매우 적합하다는 말이고 우리는 이 사실을 자본주의와 엮어서 생각한다. 따라서 적은 재화를 바쳐서 높은 효율을 뽑는 가성비 부분이나 재화를 더 많이 벌 수 있는 내용을 우리는 실용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칸트 당시에는 자본주의라는 개념이 없었고 더 나아가 pragmatische Hinsicht라는 개념도 자본적인 개념을 아닐 터이다. 따라서 실용적인 것과 동시에 pragmatisch는 실제적인 내용이 될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칸트가 그 당시 인간학을 다루는 형이상학적 개념들에 대해서 비판을 하고자 했다면 자연스럽게 뜬 구릅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에 대해서 실제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참 의미가 있는 책이지만, 질투나 덕, 마찬가지로 관상과 민족적 기개와 같은 내용을 칸트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그 내용들이 그다지 동의가 되거나 깊게 공감하거나 통찰력을 가져다 주지는 않기에 서술하지 않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