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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문철 May 29. 2023

그럴꺼면 처음부터 십자가 꺼내라고

엑소시스트 더 바티칸 

1. 엑소시즘은 내 전문 

이번 영화는 실화를 기반으로 한다고 해서 굉장히 놀랐다.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은 알겠지만 실화를 기반으로 한다는 말은 결국 두가지 중에 하나다. 대놓고 감동을 주겠다는 스토리 또는 이도 저도 아닌 망작. 이번 영화는 사실 후자에 가깝다. 공포 스릴러는 대놓고 감동을 줄 수 없다. 저번에 봤던 영화 '리바운드'와 같은 스타일이어야 감동을 주지..귀신 나오는 영화로 어케 감동을 줘 


아무튼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 영화는 제목에 충실한 편이다. 그야말로 엑소시즘하는 영화다. 

나는 굉장히 엑소시즘을 잘 보는 편인데, 뭐랄까 이번 영화는 굉장히 루즈한 편이다. 


그니까 다시 말하자면 악마에 빙의된 역할을 하는 어린 배우가 너무 기특하다. 

어쩜...많이 노력했구나..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빙의된 연기가 귀엽다. 

인뿌삐는 이런 모습에서 많이 감동 받기 때문에 엑소시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감동을 받은 영화가 아닐 수 없다. 


인생을 사는 모두가 아는 내용이지만, 인생은 로맨틱하다거나 또는 극적인 면도 있지만 일상은 평탄하다. 그니까 어느 인물의 생애가 극적이라는 말은 사용할 수 있겠지만 그런 극적인 것이 우리가 보는 미디어의 대본이나 시나리오 만큼 극적일 수는 없다. 그니까 무슨 말이 하고싶은 거냐면 이 영화로 느끼는 바가 "아 실화를 어케든 이렇게 부풀려서 아니면 어케든 내용을 각색해서 만들었구나"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답답한 것이 기독교 중심의 엑소시즘은 한계가 명확하다는 것이다. 가톨릭이든 개신교이든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기 때문에 악마는 예수를 이길 수 없다. 그니까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개연성을 말한다면 빙의된 아이를 봤을 때 바로 십자가를 들이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아 나가라" 라고 말하면 끝난다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영화는 이러한 간단한 엔딩을 피하기 위해서 이리 볶고 저리 볶고 해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독자의 입장에서는 가장 좋은 해결책을 두고도 그걸 안하고 이러쿵 저러쿵 하는 사제가 안타까울 뿐이다. 아니 그니까 처음부터 십자가 꺼내라고..탱크를 부수기 위해 가장 적합한 대전차무기를 놔두고 권총부터 시작해서 "데헷 이건 될까?" 하는 느낌이다. 


빙의된 아이의 목소리로는 악마의 권위나 권능이 드러나지 않는 다는 판단 때문인지 목소리를 새롭게 덧 입혔는데 그게 상당히 거슬린다. 너무 안맞는 느낌, 차라리 아이의 목소리로 나왔다면 더 자연스러울 거 같은데 실제로 그렇게 나왔다면 더 안무서웠을 거 같다. 


마지막으로 아쉬운 점을 이야기 하자면 영화 마지막에 사제를 보호하는 성모 마리아의 강림이 있다. 그런데 사실은 "까꿍 악마 와쪄염" 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감독은 성모 마리아 비스무리한 이미지로 여성을 사용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거기서 예수가 강림하면 게임 끝인데 그건 악마 와쩌염이 불가능 하지 않겠는가... 아무튼 여러모로 아쉬운 영화다. 


2. 신학적 관점으로 보는 엑소시즘 영화 

한국을 비롯하여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만 엑소시즘, 특히 기독교 관련 엑소시즘에서는 가톨릭이 주로 등장하지 개신교가 주인공이 된 적은 드물다. 엑소시즘을 가톨릭에서 주로 맞는 이유는 천사론과 같은 형이상학적 존재에 대한 입장도 다르지만, 특히나 사물을 보는 시선이 다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성만찬을 바라보는 가톨릭의 시선은 집례를 할 때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한다는 입장이다. 그 말은 빵과 포도주가 집례자를 통해서 성령의 권능으로 실제로 본질이 변화한다는 말이다. 집례 이후로는 빵과 포도주는 빵과 포도주로서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로 변한다. 


이 말을 왜 하는거냐면 영적인 존재에 대해서도 가톨릭은 '실제적인'관점을 가진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현실세계에 대한 영향력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물리적으로 가능하다. 물론 오늘날이야 귀신들린 사람처럼 행동하는 이를 보고 빙의된 것이 아닌 의학적인 관점으로 보고 치료할 수 있다고 하지만 뭐 기독교 중심의 세계관에서는 그게 가능했겠는가 아마 보이기로는 영화 속 어린배우처럼 그저 빙의된 것처럼 보였을 것이이다.


이것에 관해서는 루돌프 카르납의 이야기가 정확하다. 과학의 발전은 세계의 진보라고 말하기 보다는 인식의 변화라는 것이다. 그니까 옛날에 병은 신이 주신 저주였으나 오늘날에는 의학적인 관점에서 질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이 말은 신화적 인식에서 유물론적 인식으로 바뀐 것에 불과하다. 


아무튼 가톨릭에서 주로 엑소시즘을 담당하는 이유는 앞서말했던 것과 동시에 당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사용했다는 점에 있다. 그니까 중세시대에 신학자들이 주요 사용한 언어는 크게 두가지 라틴어와 헬라어다. 만약에 독일에 사는 독일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자신의 자녀가 왠지 병 또는 악마에 빙의된 것 같아서 사제를 불렀다고 해보자. 사제는 와서 라틴어로 주기도문을 외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독일어를 구사하는 부모는 전혀 듣지 못한 언어에 주술적인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그니까 악마를 내쫒는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는 사제의 모습이 굉장히 마술적이고, 주술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영향이 자신에게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가 가톨릭이 유일하게 엑소시즘의 이미지가 굳혀진 까닭일 것이다. 실제로 개신교는 만인제사장이라는 이론을 지지하기 때문에 누구나 믿음이 있다면 성령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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