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요약 : 다양성의 시대에서 신학적 해석학의 타당성
케빈 벤후저, 제일 신학
분명히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많은 현상학적인 부분에 우리는 다양성을 느끼고 있다.
신이 살아 있다는 사람과, 그런 것은 없다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둘 중 어느 하나가 절대적으로 맞고 그만큼 절대적으로 틀리지도 않은 다양성은 하나의 생각이 사회를 그리고 모든 사람은 꿰뚫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현상을 보고 판단하는 가운데서 중요한 것이 바로 "해석"이 된다. 무엇을 보고 어떻게 판단하고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질문이다.
근대에서는 '사과'를 보고 그 대상을 보는 주체와 대상인 객체를 구분하여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완전하게 파악 가능하다 생각했다.
칸트에 들어와서는 대상 자체에 대한 인식은 불가능한 영역에 넣으면서 대상을 인식하는 인식론에 집중을 하게 된다.
그 말은 같은 사과를 볼 때 누구는 '빨갛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누구는 '탐스럽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과 자체에 대한 분석은 뒤로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현상에 대해 해석하는 방향이 중요하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벤후저는 현시대에서 기독교의 신앙을 분석하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무신론적인 사람을 향해서나, 유물론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이 보는 기독교에 대해서 기독교 전통을 변증 하기보다는 오히려 전통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 중점을 두는 듯하다.
무신론자가 해석하는 것은 뒤로 하고 케빈 벤후저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간추려 본다면, 다양성의 시대에서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배제하면서 해석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해석학이 기독교로 복귀한다면, 이 일은 실로 즐거워해야 할 이유가 될 것이다.
- 케빈 벤후저, "제일 신학" 중에서 - p.341
벤후저는 근대 이후의 많은 신학이 기독교 전통에 대해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해석학에는 적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많은 지면을 활용하면서 비판한다.
특히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신학에 있어서 기독교 전통을 배제한 해석이 과연 신학적인 해석학인지 묻는다. 그에 따르면 오히려 종교다원주의적인 해석은 종교학에 가까운 것이지 신학이라 부르긴 아쉬운 듯하다.
기독교 신학의 궁극적 권위는 소통 행위 가운데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신학은 하나님이 주도하신 일, 즉 소통 행위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다.
- 케빈 벤후저, "제일 신학" 중에서 - p.424
포이어바흐가 모든 기독교의 형태는 인간의 자의식이라 했던 것을 기억한다면, 벤후저의 이야기는 포이어바흐가 보는 관점과는 전혀 다른 어떤 부분에 있어서 전통과 인간의 주체를 초월하려는 생각을 볼 수 있다. 특히나 성경을 신앙의 고백서가 아니라 통일된 증거로서 본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가운데서 하나님이 행하셨던 일에 복잡하며 다면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동일된 증거다. 그렇지만 신학적 해석을 '증거를 읽는 일'과 동일시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한다.
- 케빈 벤후저, "제일 신학" 중에서 - p.445
그러면서도 신학적 해석학을 성경을 읽는 부분에 제한하지 않고 여러 경향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그가 보이는 신학적 해석이 전혀 옛날이야기로 돌아가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많은 과학적 방법과 이성 사유에 있어서 해석학이 중요하면서도 그 중심에 기독교 전통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평점 : ★★★ (읽기는 좀 힘들었던 편, 인생 책 정도는 아니고, 그저 그런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