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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문철 Mar 30. 2019

"폭력과 성스러움", 르네 지라르

한줄요약 : 성스러움에는 언제나 '폭력'이 들어있다.

르네 지라르, 폭력과 성스러움


1. 어쩌다 이 책을 읽게 되었나...

이 책을 처음 접하는 것은 오히려 2차서적에 의해서다. 신학책 중에는 "희생양은 필요한가"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이 지라르의 이론을 적용해서 신학적으로 해석한 책이다. 그런 점에서 "폭력과 성스러움"은 그야말로 전제가 되는 담론이다.


하지만 지라르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고, "희생양 이론"에 대해서도 그렇게 아는 게 없었기 때문에 언젠가 읽어봐야지 마음을 품은 적이 있다. 물론 지금 읽었다고 해서 이제 "희생양 메커니즘"을 이해했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왜냐면 여전히 모르거든....

민음사에서 "현대사상 모험"이라는 시리즈로 내고 있다.

2. "폭력과 성스러움"의 주요 내용

2.1. 희생양 메커니즘

역시 지라르의 이론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물론 "낭만적 거짓과 소실적 진실"도 유명하기는 하지만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정립했다는 점에서 이 희생양 개념은 가히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희생양 개념에서는 폭력이 항상 나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없애는 좋은 폭력에 대해서 언급한다.


2.1.1 희생양이란...

희생양이란 사회를 위해서 희생되는 제물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회 구성원을 위협하는 어떤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사회 공동원들의 염원을 담은 제물이 된다.


사회는 무슨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보호하려고 애쓰는 자신의 구성원을 해칠지도 모르는 폭력의 방향을 돌려서, 비교적 그 사회와 무관한, 즉 "희생할 만한" 희생물에게로 향하게 한다.
- 르네 지라르, "폭력과 성스러움" 중에서 - p.14


희생제의를 통해서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폭력을 해소할 수 있다. 이 의미가 실제적으로 해소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존재하는 폭력을 실제로 행한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공동체에서 나타난다는 폭력성은 희생제물에게 모두 투영이 되며 그것으로 인해서 사회 구성원 간의 결집성을 확보한다.


2.1.2. 폭력과 성스러움의 상관관계

희생제물에게 향한 폭력으로 인해서 그것은 '성스러운' 것이 된다. 그것이 어떤 점에서 폭력성을 담지하지 않게 되냐면, 희생제의를 행하는 집단 구성원과 희생물이 이 폭력을 폭력이 아닌 것으로 속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스러움에는 그 내면에 폭력성이라는 것이 담지하게 된다.


그것은 언제나 공동체가 인정하는 가장 큰 평화, 즉 살해 이후에 희생물에 대한 만장일치에서 유래하는 평화를 되살리려고 애쓴다. 언제나 공동체 속에 축척되는 악취들을 제거하는 것과 기원의 신선함을 되찾는다는 것은 실은 똑같은 것이다.
- 르네 지라르, "폭력과 성스러움" 중에서 - p.156


따라서 폭력을 방어하는 것은 작은 폭력이다. 모든 희생 개념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제의가 폭력적인 것은 분명 하나, 그것은 다른 큰 폭력을 방지하기 위한 작은 폭력이 된다. 모든 문화나 종교적 제의에서는 이런 희생양 메커니즘이 일종의 모델이 된다.


모델이 되는 것은 그 모델이 아니다. 모방을 하게 만드는데, 욕망을 모방함으로써 폭력이 폭력이 아니게 되는 매직을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이것은 이로운 폭력이며, 이 제의는 성스럽다"라는 개념이다. 따라서 지라는 제의에 대서 폭력이 담지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2.2.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새로운 해석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나오는 모든 개념을 나열하고 싶지만 이건 레포트가 아니니까^^ 자세한 건 읽어보는 걸 추천하는 것으로 말하고 싶다. 물론 이야기하지 못한 부분 중에서 가장 감명이 깊은 부분은 바로 "프로이트 비판"이라 할 수 있다.


특히나 오이디푸스에 대한 지라르의 새로운 해석은 우리가 욕망을 어떤 식으로 발현하는가에 대해서 프로이트와는 다른 방식으로 해석한다. 그 부분은 바로 욕망을 추구하는 직접적인 주체가 아니라 하나 걸러서, 하나를 거쳐서 발현한다는 것이다.


모방을 통해서 욕망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희생제물을 통해서 드러낸다. 그것은 '욕망'이 아니라 '욕망 모방'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욕망'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설명해주고 있지만 '욕망 모방'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불완전하다.


우리는 오이디푸스 문제를 밝혀내고, 친부 살해와 근친상간을 아직은 애매모호한 "속죄양" 현상으로 보게 되면, 우리는 필히 모든 정신분석학적 사고에 이의를 제기하는 숱한 문제들, 즉 이 시론에서 우리가 지적하려는 많은 문제들을 언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르네 지라르, "폭력과 성스러움" 중에서 - p.313
이처럼 매개된 욕망은 욕망 주체와 욕망 대상 사이에 욕망의 중개자가 존재하는 "삼각형적인 욕망"이 그 기본구조이다.
- 르네 지라르, "폭력과 성스러움" 중에서 - p.494


욕망은 직접적인 것이 맞으나 그것이 발현되는 것은 중재자를 통해서 발현된다. 마찬가지로 항상 sns를 하게 되면 대두되는 학벌주의를 비롯한 일들은 그 자체로서 이미 중재가 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의 욕망이 직접적으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학벌주의라는 것을 통해서 즉, '서울대'라는 이름을 통해서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3. 어려운 책을 읽는 건 역시나....

책에 대한 전체적인 평을 하자면 읽기 어렵다. 물론 나도 어영부영 읽는 것이라 호평을 하기도 애매하고 혹평을 하기도 애매하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철학을 읽는다는 건 원래 뭔 소리인지 모르지만 그냥 읽는다는 점이다.


읽기 어려운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냐면 책이 손에 잘 안 잡히고 하루에 한 단원 이상 나아가지 않고 흰 건 종이고 검은 건 글씨라고 보일 때 "아 이 책이 겁나 어려운 거구나"라고 알 수 있다.


이 책이 현실에 나타나는 폭력에 대한 모방과 힘없는 희생제물에 대해서 잘 알려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설명하는 지라르의 방식은 꽤나 어렵다. 물론 이 책이 철학 입문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는 점을 감안해서 라도 말이다. 고로 다들 그냥 다른 책 보시길




평점 : ★★★ (이건 좀 꾸역꾸역 읽은 감이 없잖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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