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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문철 Mar 23. 2019

"난설헌", 최문희

한줄요약 : 공모전만 아니라면 우린 이미 끝났어

최문희, 난설헌


1. 책 구성에 대한 이야기

1.1. 전반부는 정말 좋다.

좋은 책이라고 할 수 있는 점은 독자가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상상의 나래라고 하는 것이 마냥 망상 속에 머무르는 관념이 아니라 작가가 쓰는 문체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를 이미지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미지화라는 것은 단순히 시각화가 아니다.

혼불 문학상 대상이라고 한다

국어시간에 배웠던 개념 중에 흔히 공감각화라는 표현이 있는데, 저자의 책에서 이런 모습을 잘 찾아볼 수 있다. 난설헌, 즉 초희가 걸어다는 배경에 대한 설명이라던지 색감에 대한 표현이라던지 그런 부분에 있어서 봄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공감각화는 매우 잘 나타나고 있다.


앵두나무 성긴 이파리가 바람에 흩날린다. 이제 겨우 몇 잎 붙어있다. 아침저녁 찬바람이 옷깃 속으로 파고들어, 초저녁에 따스하던 아랫목이 새벽이면 오스스 한기에 몸이 떨린다.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 최문희, "난설헌' 중에서 - p.137


때로는 색동옷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어떤 열망을, 봄 꽃과 같은 표현에서는 설렘과 아련함을, 가을 표현하면서 자기 인생에 느낄 수 있는 쓸쓸함도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다. 특히나 저자가 말하는 초희의 초반부 부분의 분위기는 정말 탁월할 정도로 봄 내음이 난다.


1.2. 후반부로 들어가면서 헬조선 시작

후반부로 들어갈수록 앞에서 느꼈던 산뜻함은 이내 사라지고 만다. 난설헌이라는 워낙 유명한 조선시대 시인이라서 그런지 어느 정도 역사적 스포가 있기에 그 미래를 예상할 수 있었다. 예상을 할 수 있다는 점은 결말에 대해서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에 대한 기대가 없다고 바꿔서 말할 수 도 있다.


특히나 시대적 배경이 조선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읽기에 불편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다. 중간 이후로 넘어갈수록 들었던 생각은, "이 내용으로 결국 작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였다. 초희는 결혼 이후에 며느리로서 살아간다. 마치 "초희"라는 이름은 지워지고 "며느리"라는 정체성 밖에 남지 않은 듯하다.


안방 송씨는 내일 날이 밝은 대로 당장 친정에 가라는 엄명을 내린다. 이제는 그런 괴기한 몰골을 하고 있는 며느리가 아들의 앞길을 막는 요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 최문희, "난설헌" 중에서 - p.255


보여주는 내용은 마냥 고부갈등이 아니다. 단순히 계급사회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에 있어서 자신 내부에 의한 한계가 아닌 외부적인 조건에 의한 안타까운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은 오직 '시'를 지을 때 뿐이다. 마치 사르트르의 '구토'에서 로강탱이 살아있음을 느낄 때마다 구토를 느끼는 순간처럼 말이다. 그것을 제외하고서는 항상 초희는 자신의 삶이 아니라 살아야 하는 삶을 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도대체 작가가 의도하고자 하는 건 뭘까...

2.1. '허균의 누이'가 아니라

이처럼 작가의 문체는 때로 공감각적으로 때로는 책을 덮을 순간이 많을 정도로 악랄하다. 여성을 표현하는 조신시대적인 방식은 가히 책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하기도 하다. 하지만 어떤 부분에 있어서 묘사하고 있는 이미지가 너무 눈에 명확하게 보일 정도로 수려할 때도 있다.


결국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난설헌에 대해서다. 여전히 '허균의 누이'라고 알려져 있는 분을 그런 구속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항상 누군가에게 종속되어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여류작가라고 한다거나.. 허균이야 워낙 유명한 사람이니까 그 유명세를 기회로 삼아서 표현한다고 하더라도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건 분명 '난설헌'일 것이다.


2.2. 의도했을까? 하지 않았을까?

유명한 82년 김지영 같은 경우에는 조남주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다. 그것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여성의 삶에 대해서다. 그래서 때로 비판을 받고 있는 '한 여성에 대한 과도한 차별'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부분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조남주 작가는 그런 형태의 워딩을 사용했을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조남주 작가가 쓰는 말이 평소에 작가가 사용하는 무의식적인 부분이 아니라 드러내고자 하는 가치관에 대한 저항의 모습이다.


다시 돌아와서 최문희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난설헌'에 대해서다. 그 시대적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그녀가 보여준 극복 정신과 작품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중간중간에 난무하는 책을 덮을 정도의 워딩은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평소의 무의식적인 언어를 드러내고 있는지 의문이 간다.


난설헌을 말하는 것이 차별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나는 작가가 드러내는 언어가 조남주 작가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저항의 목소리라 보고 싶다. 근데 그런 거 치고 굉장히 거부감이 드는 말이 있다. 물론 조선이라는 상황에서 본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평점 : ★★★ (공모전 쓸 때는 겁나 짱짱맨이라고 써야지...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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