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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문철 Feb 29. 2020

존재의 다가옴과 존재자의 품어짐 동일성과 차이에 대하여

마르틴 하이데거, "동일성과 차이" 

마르틴 하이데거, 동일성과 차이 


이 책에 실린 하이데거의 글은 그가 마지막 원숙한 사상을 완성했을 때의 작성되었다. 하이데거 후기 작품이라서 그런지 초기의 강렬함보다는 훨씬 더 부드러움이 넘치는 글이라 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전통 형이상학이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차이를 고찰하지 못하면서 생긴 망각의 역사였다고 주장한다. 특히나 차이에 있어서 하이데거의 고찰은 추후 데리다와 같은 사람에게 큰 영향을 준다. 


동일률은 흔히 A=A로 불린다. 그래서 동어반복이라고도 하는데 이 부분을 이해하기엔 언어의 한계를 살짝 느낄 수밖에 없다. 영어나 독일어 같은 경우네는 동일률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서 the tree is green를 말한다면 tree = green이다. 그렇기에 나무가 푸른 상태에 있다는 사실과 등치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말에는 이것은 그냥 "나무가 푸르다"라고 하지 "나무가 푸른 상태에 있다"라고 하지는 않는다.


특히나 하이데거는 독일 철학가라는 점에서 sein 동사가 있는 것과. ~이다.라는 것을 같이 서술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동일성의 통일성이야말로 존재자의 존재 속에서 근본 특징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것을 앞서 말한 것처럼 "있는 것" = "~이다"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서술했던 것처럼 존재는 동일성으로부터 "말 건네지고 있는" 것임을 확인한다.


물론 전기와 차이점은 모두가 두루 알듯이 "언어"에 관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이데거는 동일성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바로 언어에 대한 사유라는 점이다. 


동일성의 말 건넴(Anspruch)은 존재자의 존재로부터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동일성 속에서 존재로부터 다가오는 말 건넴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함께 속해 있음(Zusammen-gehörigkeit)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공속성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곧 시간성이다. 전기와 들어맞는 이 치밀함 대단하다


이러한 동일성 속에서 존재의 다가옴은 우리에게 기독교적인 용어로는 "계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 그런 점에서 동일성으로 인하여 존재의 말 건넴은 인간 스스로의 자기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존재를 향한, 존재로부터의 사유는 우리에게 언제나 앞선-사유(Vordenken)이다. 후기로 들어갈수록 하이데거는 기술문명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않는데 아마 이 부분이 그것에 해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기술문명으로부터 우리는 이끌리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다. 기술과 문명이 내 앞에 있는 어떤 사유로부터 사유하지 못하며 마찬가지로 인간과 존재의 동일성의 본질에 대해 진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차이"에 대해 사유하게 된다. 언젠가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읽겠노라 다짐을 하는데 이러한 사유의 독특성이 하이데거에게 어느 정도 빚을 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우리는 동일성에 대한 다른 "차이"를 사유하게 된다. 특히 이 부분이 데리다에게도 영향을 주는데 그 내용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사유하다 보면 우리는 지속해서 차이를 생각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황금비율이라 불리는 다빈치의 그림을 인간의 표준이라고 상정했을 때, 우리는 그 속에서 "여성"이 지워진 차이를 봤었고, 여성과 남성을 인간으로 상정했을 때 그 속에서는 다양한 성정체성이 지워진 차이를 발견한다.


마찬가지로 사유는 이렇게 차이를 낳는다. 그런 점에서 하이데거는 동일성과 차이의 본질적인 것을 "사이-나눔"이라고 보고 있다.


동일성을 의미하는 "생기"와 차이를 의미하는 "품어줌" 속에서 존재는 존재자에게 다가온다. 추후에 "탈존"에 대한 의미를 이런 지점에서 찾는 게 아닐까 싶다. 순전히 내 생각 자세한 건 찾아보는 걸로~ 


존재의 건너옴과 존재자의 품어지는 도래함이 서로에게 향해지며 것이 바로 "사이-나눔"이다. 이 사이의 영역은 존재의 진리가 스스로 탈 은폐하여 드러나는 지점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카푸토라는 신학자가 왜 아퀴나스와 하이데거를 연결해서 사유하려고 했는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에쎄의 분여는 확실히 존재의 다가옴으로 느껴지고 그 속에서 존재의 드러남은 앞서 말한 것처럼 특별한 신의 계시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종교성을 긍정한다면? 아무튼 그런 점에서 분여된 피조물은 존재자의 나눔과 동일하게 서로를 근거 지워 현존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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