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그저 삶일 뿐이란다

02 슬픔이 삶의 선물이 되는 이유

by 권미림

"살다 보면 기쁜 일만큼이나 슬픈 일도 있고, 이길 때가 있으면 질 때도 있으며, 일어서는 것만큼이나 넘어지는 경우도 허다하단다. 배부를 때가 있으면 배고플 때고 있고, 좋은 일과 마찬가지로 나쁜 일도 일어나기 마련이지."_<그래도 계속 가라>, p.24







어느 이른 봄, 수목원에 갔었다. 봄이라지만 여전히 수목원 곳곳에는 눈이 쌓여 있었고, 품에 드는 차가운 바람에 온몸이 시리던 날이었다. 나무들은 여전히 앙상했으며 그 앙상한 가지에 걸린 하늘마저 흐렸던 날. 뭐가 그리 급했는지, 새순이 돋는 봄을 보겠다며 집을 나선 것이 허무하기만 했었다.


그렇게 겨울과 봄 어디쯤에 놓인 수목원은 참 이상해 보였다. 나무도, 햇빛도, 피부에 스치는 찬 기운도 아직은 겨울에 가까운 것들이었지만, 흙 위에 쭈그리고 앉아 분주히 손을 쓰고 계신 정원사의 손엔 봄꽃이 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봄을 앞당겨 보려고 여기저기 꽃화분을 심는, 무진장 애쓰는 수목원의 모습이었다. 하긴. 나 같이 성미가 급한 사람들은 벌써부터 봄을 찾아 이곳에 들릴 테니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직 녹지 않은 차가운 땅에 심기는 봄꽃들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맞아, 봄은 이렇게 오는 게 아니지. 언 땅을 억지로 파내고 거기에 먼 나라에서 수입해 온 꽃화분을 옮겨 심는다고 해서, 여기저기 봄 페스티벌 현수막을 걸어 놓는다고 해서 봄을 앞당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고 보면 섭리라는 게 분명히 있기는 한 것 같다. 겨울이 아무리 길어도 봄은 온다. 봄은 여름을 부르고, 숨 막히는 더위는 어느 순간 목덜미에 시원하게 닿는 가을에 자리를 내준다. 가을은 또 겨울 품에 안기겠지. 계절은 밀어낸다고, 잡아당긴다고 바뀌는 게 아니다.





*

한 사람의 삶에도 계절과 같은 섭리가 있다. 그걸 섭리라고 부르는 게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사람의 삶에는 손 쓸 수 없는 태어남부터 죽음까지의 서사가 있고, 그걸 섭리라고 부르는 게 그리 잘 못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엔 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는가. 슬픔,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고뇌도 어느새 기쁨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꼭 계절 같이. 어떤 것은 우리가 조절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어찌할 방법 없이 그저 조용히 참여할 뿐이다. 그것이 배고픔이든 배부름이든 말이다.


하지만, 모든 게 지나갈 걸 알지만. 영원한 슬픔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슬픔에 잠길 땐 꼭 죽을 것 같이 힘이 든다. 도대체 이 슬픔이 우리의 삶에 무엇을 가져다준단 말인가.



하지만 결국에는 우리가 흔히 가질 수 없는
선물을 가져다주기도 하지.
인생이란 슬픈 것만은 아니란다.





*

기둥 같았던 외아들의 죽음이 겨우 콩꼬투리만 한 손녀의 웃음으로 위로를 받을 때. 그러니까, 생전 위로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참척의 고통이 새로운 생명에 의해 위로를 받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속수무책이셨다는 박완서 선생님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¹


속수무책. 슬픔이 찾아드는 것에도 속수무책이지만, 슬픔이 가고 위로가 깃드는 것에도 역시 속수무책이다. 어쩌면 기쁨은 슬픔이 있기 때문에 기쁨이 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릇이 비워진 뒤에야 새 물이 담길 수 있듯이, 피곤함 뒤에 휴식이 뒤따르듯이.


그렇게 슬픔은 슬픔대로, 결국 선물이 된다.



미움을 극복할 사랑이 있고,
너그러움이 탐욕을 줄일 수 있으며,
바람이 홍수를 말려 주거나
비가 가뭄을 끝내주는 것과 똑같은 식으로
진실함이 거짓을 드러낼 수 있는 법이란다.



슬픔은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뿐만 아니라 살아갈 용기를 북돋아 주기에 선물이 된다. 삶이 우리의 길 위에 역경을 가져다 놓았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더욱 강해질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

그러니 그대, 슬픔에 오래 잠겨 있지 말라. 슬픔에서 한 발짝 떨어져 그 모양을 가늠해보라. 그것이 가져다주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 그 슬픔과 조화되어 삶을 아름답게 만들 기쁨을 기다리라. 삶은 그저 삶일 뿐이다. 원래 생긴 그대로인, 삶일 뿐이다.



그것이 인생이지,
원래 생긴 그대로인.






한 권의 책, 수만의 용기

<그래도 계속 가라>

_조셉 M. 마샬 지음, 유향란 옮김, 조화로운 삶

@john.and.molly

photo. @ronaldsmeets, unsplash


¹<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p.57,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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