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함이란 삶의 폭풍에 용감하게 맞서고, 실패가 무엇인지 알고, 슬픔과 고통을 느끼고, 비탄의 구렁텅이에 빠져 보고 나서야 얻을 수 있는 것이란다."_<그래도 계속 가라>, p.94
요즘 대화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깊이 들어온다. 공원을 걷는 산책길이나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실 때, 아파트 내 어린이집에서 넘어오는 아이들의 소리를 들을 때나 하다못해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에도 나는 대화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게 생기롭게 보인다. 꼭, 살아 있다는 건 저런 거구나 싶어서. 자기의 얘기를 꺼내고, 듣고, 공감하는 두 사람 사이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생기가 오고 가는 것 같다.
또, 자주 본 적은 없지만, 울고 있는 사람을 볼 때도 생기를 느낀다. 작은 카페에서 혼자 책을 읽던 날, 카페 안에는 나와 한 아주머니만 손님으로 앉아 있었다. 조용한 시간, 오랫동안 집중하여 책을 읽다가 문득 내 뒤에서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뒤를 돌아볼까 아니면 손수건이라도 건네야 할까 싶다가도, 그냥 모르는 척하는 게 제일 나을 것 같아 읽히지 않는 책을 들고만 있었다.
아주머니는 한동안 계속 우셨다. 카페 사장님은 아주머니가 계속 울 수 있도록 음악 볼륨을 가만히 높였고, 나는 속으로 아주머니의 마음에 위로가 깃들길 바랐다. 그렇게 카페 안은 묵직한 슬픔이 내려앉았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아주머니는 조용히 자리를 정리하고 카운터로 가서 사장님께 인사를 건네셨다. 그제야 나는 아주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깡마른 뒷모습. 그렇다고 해서 추레해 보이지는 않았고, 오히려 슬픔을 다 털어낸 것 마냥 가뿐하게만 느껴지던 모습이었다. 어느 순간, 카페를 채우던 묵직한 슬픔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우리 영혼이 울 때라고 알려 주면
울 수 있어야 해.
슬픔을 억누르지 않고 우는 일은 꼭 뜨거운 사우나 속에서 땀을 내는 일과 같다. 애통해하는 것은 상실감과 분노로 인한 슬픔을 정화시키는 일이다.
*
초등학교 시절, 내 별명은 한 동안 '울보'였다. 윗집 사는 남자애와 같은 반을 했었는데, 그 애가 우리 엄마한테 꼬지르듯 했던 말을 잊을 수 없다. 아줌마, 얘는 손을 이마에 대고 고개를 숙이면 우는 거예요. 얘 맨날 울어요.
서른이 넘어서도 나는 울보다. 아니, 서른이 넘어서야 겨우 다시 울보가 됐다. 처음에는 갑자기 터져 나오는 눈물에 당황했지만, 지금은 울고 싶을 때면 참지 않고 울어 버린다. 그렇게 마음껏 슬퍼한다. 단순히 속이 시원해져서가 아니라, 울고 난 뒤 마음에 새롭게 돋는 생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그런 종류의 생기는 삶이 성숙해지는 데 쓰일 좋은 자양분이 된다. 다른 사람들의 슬픔을 돌아볼 너그러운 시선과 슬픔을 슬픔으로만 보지 않을 현명한 안목이 된다.
그리고 그 생기는, 반드시 다시 찾아올 슬픔을 너끈하게 그리고 포근하게 안아줄 힘이 되어 준다.
그럼, 비통함도 다 목적이 있단다.
슬퍼한다고 해서
네가 약하다는 뜻은 아니야.
당신 속에 있는 슬픔에게 말을 걸어 보라. 슬픔을 외면치 말고, 어떤 말이라도 좋으니 그 슬픔과 대화해 보라. 슬픔이 눈물로 대답한다면, 그 모든 대답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 주어라. 당신 안에 전에는 갖지 못했던 새로운 생기가 돋아날 것이다.
한 권의 책, 수만의 용기
<그래도 계속 가라>
_조셉 M. 마샬 지음, 유향란 옮김, 조화로운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