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다 지나갈 때까지

11 폭풍우가 친 다음 날 하늘은 더욱 맑다

by 권미림

"우리가 어떻게 폭풍에 맞서야 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로지 그것을 견뎌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단다."_<그래도 계속 가라>, p.100







인도 북부 여행 중의 일이다. 이틀을 기차 안에서 보내고 찾아간 작은 농촌 마을은 밤새 내린 폭우로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가이드는 아무 걱정 없다며(마법의 No problem!) 배낭을 머리 위로 들고 자신을 따라오라 했다. 입고 있는 옷은 싸구려라 버려도 괜찮았고 신발은 샌들이니 더욱 상관없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흙탕물 속을 저벅저벅 걸어갈 걸 생각하니 께름칙했다. 하지만 별 수 있나. 우리는 가이드를 따라 배낭을 머리 위로 들고, 누런 물속에 몸을 담갔다. 물은 가슴팍까지 차올랐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나니 어느새 물은 허리께로, 허벅지 아래로, 결국엔 발목까지로 내려가 있었다. 우리는 진흙에 빠졌다가 건짐 받은 생쥐 꼴이 되어 서로를 보고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디선가 맑은 물을 얻어 대충 흙을 씻고, 마을 사람들이 차려준 음식을 먹었다. 늦은 저녁이었다. 짓다 만 듯한 허름한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풀고, 전구빛 하나 없는 컴컴한 마을을 둘러보았다. 건물 옆에 있는 커다란 나무엔 반딧불이 하늘의 별보다 많이 깃들어 있었다.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색의 예쁜 빛이 천천히 꿈뻑였다. 그 빛은 분명 우리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 고생을 하며 여기까지 찾아온 우리에게 잘 왔다고, 이제 좀 쉬라고 말을 건네는 위로였다.



우리가 어떻게 폭풍에
맞서야 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로지 그것을 견뎌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단다.





*

사실 그 마을까지 찾아가는 여정은 죽을 것 같이 힘들었다. 기차 안 내 자리에 누워있는 남자를 끌어내리는 일이나 씻지 못하는 괴로움, 손바닥 반만 한 바퀴벌레, 무거운 배낭, 쉬지 않고 걷는 일정, 그놈의 No problem. 호기롭게 출발한 한 달 인도 여행이 그렇게나 길게 느껴질 무렵에 찾아간 작은 마을이었다. 물바다가 된 그 마을은 혹독한 여행의 절정이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첫 열흘은 낯선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었다. 역시, 여행이란 이런 거지! 를 외치며 쉬지 않고 기뻐했다. 하지만 두 번째 열흘은 적응은커녕 이해하기 어려운 모든 것들 앞에 슬슬 화가 나가 시작했고, 마지막 열흘은 그저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듯, 인도는 인도일 뿐이라는 정신 승리의 길을 걷기로 작정한 때였다. 하지만 인도는 역시 쉽지 않았다.


결국 물바다가 된 마을 어귀에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여행을 즐기거나 정복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버티자고. 모든 것이 지나갈 때까지 견디자고. 폭풍을 뚫고 앞으로 나가려고 하지 말고, 폭풍이 다 지나갈 때까지 두 무릎을 감싸 안아 등을 둥글게 말고, 기다리자고.


그랬더니 정말 폭풍이 지나가 있었다. 눈앞엔 수천의 반딧불이 꿈뻑이고 있었고 나는 따뜻한 침낭 속에 누워 허리를 쉬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의 인도 여행이 끝나가고 있었다. 스무 살의 여름은 그토록 짧았다.





*

버거운 인도에 맞서서 이기려고만 했다면 아마 나는 여행을 마치지 못했을 것이다.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와 버렸거나, 바라나시나 뉴델리에 있는 깨끗한 호텔 침대에 누워 후회만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마음을 버리고 그저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웅크리고 앉아 견디어내니 어느새 인도는 내 마음에 들어와 있었다.


때로는 그렇게 가만가만히 다 지나갈 때까지 웅크리고 앉아 있어야 했던 것이다.






한 권의 책, 수만의 용기

<그래도 계속 가라>

_조셉 M. 마샬 지음, 유향란 옮김, 조화로운 삶

@john.and.molly

photo. @antipodos,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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