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꼭대기를 향해, 해돋이를 향해, 희망을 향해 내디딘 가장 연약한 한 걸음이 가장 맹렬한 폭풍보다 훨씬 더 강하단다."_<그래도 계속 가라>, p.165
대학교 1학년 때 어쩌다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아 강의를 듣게 된 적이 있다. 철학 강의였다. 깔끔하게 정돈된 턱수염과 자연스럽게 뒤로 넘긴 회색빛 머리카락의 교수님은 그의 지적인 외모와 어울리는 중저음의 목소리로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과 대화하기를 좋아하셨다. 물론 강의 시간에 말이다. 그날도 예외 없이 교수님은 앞자리에 앉은 학생들에게 질문하셨다. 여러분이 읽은 책들 중에 본인 인생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책을 소개해 주세요. 어, 거기. 한번 말해 볼까?
거기에 앉은 사람은 나였다. 아, 저, 저는. 강의실에 앉은 백 명의 학생들의 시선에 뒤통수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나는 개미만 한 목소리로 <앵무새 죽이기>요, 라고 답했다. 그건 당시 내가 읽고 읽던 책 제목이었다. 앵무새? 아마 교수님은 신학이나 철학책 제목을 기대했던 것 같다. 약간 실망한 듯한 표정으로 교수님은 그 책의 저자가 누구냐고 물으셨다. 하퍼 리예요. 하퍼 리? 예, 하퍼 리요. 동양 사람이니? 나는 처음 듣는구나. 당황하는 내 표정에 학생들이 쿡쿡 웃었다.
나는 그때 내가 작가의 이름을 잘못 말한 줄 알았다. 하지만 집에 와서 다시 확인해보니 하퍼 리가 맞았다. 나는 강의실에서 당당하게 예, 하퍼 리. 미국인이고 퓰리쳐상을 받은 작가예요!, 라고 말하지 않았던 걸 후회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한동안 나는 누군가 읽을만한 책을 소개해 달라고 할 때면, 당당하게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를 얘기하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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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앵무새 죽이기>는 분명 지금까지도 내 삶에 영향력을 끼치는 책들 중 하나다. 소설은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가 백인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를 받는 흑인 남성 로빈슨을 변호하면서, 핀치의 가족과 동네에서 벌어지는 일을 핀치의 어린 딸 스카웃의 시각에서 그리고 있다.¹ 나는 그 두꺼운 책을 단숨에 읽어 내리며 변호사 핀치에게 푹 빠져 들었다. 그가 마치 거대한 산을 정복하기 위해 아주 밑에서부터 부지런히 걸어 올라가고 있는 한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거대한 산은 차별과 선입견, 군중 심리에 의한 진리의 묵살이었다.
때로는 길이 너무 험해서 우리가 강하고 약한 것과는 상관없이 기어갈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고…….
처음 한 걸음이 중요할까, 마지막 한 걸음이 중요할까. 시작이 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첫걸음을, 유종의 미를 생각하는 사람은 마지막 완성의 한 걸음을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걸음은 '그다음 걸음'이었다.
첫 번째 걸음을 이을 다음 걸음과 그다음을 이을 또 다른 다음 걸음. 산이 너무나 거대해 보일 때는 시작이나 끝을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묵묵히 바로 앞에 놓인 한 걸음을 생각하는 게 좋다. 기어서라도 내디는 한 걸음, 그 연약한 한 걸음들이 모여 폭풍을 이길 강함이 되어 산을 넘게 하는 것이다.
결국 그런 걸음들 중의 하나가 차이를 만들게 되지. 성공이란 대개 작은 것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 법이거든.
작은 것들이 모여 이루어내는 위대한 일에는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이 담긴다. 한 그루, 한 그루 심은 나무들이 모여 드넓던 사막을 거대한 숲을 바꾸어 냈다는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것처럼. 저 깊은 곳, 잊혀가는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찾아가 꿈을 말하는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희망을 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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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도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작고 연약한 그다음 걸음들이 모여 삶이라는 여행을 완성한다. 한 걸음의 보폭이 어느 정도의 거리가 되어야 한다든지, 항상 당당하고 힘차게 걸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전혀 노력하지 않는 것과 아주 조금이라도 노력하는 것의 차이는 분명하다. 희망이다. 희망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기도 하지만, 움직이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기도 하니까. 그래, 결국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삶의 희망이다. 우리 안엔 강한 희망이 있다.
한 걸음 한 걸음이야말로 기도에 대한 응답이자, 캄캄한 절망에 도전하는 불꽃이니라. 어둠에 도전하도록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