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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Sep 04. 2020

어느 소설의 플롯처럼

    제주도에 있으면서 세 개의 태풍을 맞았습니다. 그 태풍들은 어느 소설의 플롯처럼 우리의 제주도 이야기를 나누어 주고 이끌어주었습니다. 첫 번째 태풍은 우리의 발목, 아니 우리가 탈 배를 붙잡으며 입도를 막았지요.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예정했던 날보다 늦게 배에 올랐습니다. 어렵게 입도하게 된 날에도 태풍은 여전히 바람과 비를 흩날렸지만 우리는 태풍을 미워하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다행히도 그 뒤로 오랫동안 하늘은 새파랬고, 우리는 매일 바다에 나갔습니다. 매일 수영을 했고 모래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두 번째 태풍은 첫 번째 태풍보다 좀 더 길게 비를 내렸습니다. 지만 마음은 그 전보다 담대했어요. 래서였는태풍을 하는 제주도, 비 오는 제주도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습니다. 태풍이 부는 첫날에는 꼼짝 않고 숙소에만 머물렀는데요, 강한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는 돌담과 꺾이지 않는 야자수들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그 단단함에 놀라워했습니다. 태풍이 지나간 뒤 비에 젖은 오름이  색과 냄새 배웠고, 바람이 부는 바다가 얼마나 무서운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구만큼은 안전하다는 사실도 배웠지요. 그렇게 두 번째 태풍 역시, 지나갔습니다. 얼마 동안 잔잔한 날들이 이어졌어요.



    그리고 세 번째 태풍. 그건 세 개 중에 가장 무서운 태풍이었습니다. 제가 있는 곳에도 두 번의 정전이 있었고, 단수가 될 것이라는 연락도 받았습니다. 지난번 태풍을 견뎌낸 야자수들이 이번에는 꼭 꺾여 버릴 것 같아 마음 어요. 강이 범람할 것 같으니 얼른 마을회관으로 대피하라는 재난 문자 마음을 뒤흔들었습니다. 아, 부디 아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낮은 데 사는 사람들이 무사해야 할 텐데. 거친 비바람은 땅거미와 뒤엉켜 낮보다 더욱 소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앞으로의 모든 날이 태풍 속에 있지만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태풍과 두 번째 태풍이 소멸된 것처럼 말입니다. 아아, 태풍이 덜 익은 귤들을 떨어뜨릴 수도 있고, 나무들을 꺾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가거나 망가뜨릴 수도 있겠지만. 결국 이번 태풍도 소멸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새파란 하늘을 내고, 잔잔한 날들을 불러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끝에 잊고 있던 가을을, 그 오롯한 계절을 보내올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세 번째 태풍도 지나갔습니다.

    그제야 저는 당신을 올렸습니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태풍을 맞으셨까, 그 태풍 속에서 얼마나 많은 소중한 것들을 빼앗기셨을까. 그 생각에 마음이 괜히 억울해지고 울컥하다가도, 이곳 제주도에서  태풍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독일 수 있었습니다. 맞아요, 그것들은 당신을 영원히 쓰러뜨리지 못했습니다. 결코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태풍처럼 불던 인생의 역경과 아픔을 당신은 끝끝내 이기셨던 것입니다. 돌담처럼 굳건히, 나무처럼 유연하게. 역경 앞에 잠깐 두려웠을지언정 결코 포기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당신의 삶은 당신의 이김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제주도에 있는 동안, 어쩌면 저는 네 번째 태풍도 맞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에는 당신 생각날 것 같습니다. 태풍에 무너지지 않고 여전히 인생을 살고 계신 당신을요.


    내 속에도 당신의 지혜가 그림자처럼 짙게 드리워지길 바라 주세요. 육지로 나가면 다시 편지드리겠습니다. 건강하시고요,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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