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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Sep 02. 2020

비 온 뒤엔 물영아리 오름으로

    지난 태풍은 얕은 비구름을 남기고 제주도를 떠났다. 이런 날에는 호다닥, 물영아리 오름에 가야 한다. 우의를 챙기고, 긴 바지를 입고, 마실 물을 담아 들고. 날이 완전히 개기 전에 얼른 출발해야지, 하는 작은 조바심과 함께. 지난밤 내린 비는 오름을 촉촉이 적셔두었을 것이고 습지에도 물이 고이게 해 두었을 것이다.



    우리는 오름 가운데 있는 습지로 바로 가는 길 대신 낮은 데를 두르는 좁은 길을 먼저 걷기로 했다. 그 길은 목초지의 경계를 정해두는 낮은 돌담인 잣성을 옆에 두고 길게 이어졌다. 수백 년 전 세워졌다는 잣성은 여전히 잣성으로 남아 풀을 뜯고 있는 네 마리 소 가족 안전하게 지켜주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 걸으면 두 갈래 길이 나오고, 우리는 왼쪽으로 꺾었다. 숲은 점점 더 짙어고 구름은 금 더 내려앉아  비가 쏟아질 것 같았지만 아직이었다. 왼쪽 길은 우리를 조금씩 높은 데로 이끌었다. 위로 오를수록 깊어지는 숲은 진한 색과 냄새로 우리의 입을 다물렸다. 그만 떠들고 이젠 조용히 구름 소리를 들어 보라는 듯이.


    전망대에 올랐을 때 구름은 드디어 땅과 맞닿아 나무들을 삼키기 시작했다.


    "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아."



    정말 그랬다. 좁은 전망대 위에 올라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서서 구름을 맞는 일은 꼭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일처럼 느껴졌고, 멀미가 났다. 멀미를 쫓기 위해서 우리는, 춤을 췄다. 손을 잡고 천천히 삥삥 돌기. 누구라도 우리를 보았다면 부끄러워 당장 그만 둘 일. 그러나 거긴 구름 속이었으니까, 그만 춤을 추고 말았다.


    전망대를 지나 어두운 숲으로 들어갔다. 긴 또 다른 세상이었다. 꼭 저쪽에서 호빗들이 걸어오거나 아니면 해리포터가 볼드모트를 피해 뛰어 도망갈 것 같은 숲. 얇은 나뭇가지라도 내 어깨 위로 툭 떨어지면 으악, 하고 내달릴 것 같은 숲. 잰걸음으로 한참이나 걸었지만 숲은 자기의 끝을 쉬이 내주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 다시 밝은 데로 나오고, 조금 더 걷고 나서야 습지로 내려가는 길이 나왔다.


    '습지까지 앞으로 3분'


    마음 따뜻한 누군가가 손으로 썼을 이정표를 보니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정말, 습지다.


    비에 젖어 쳐진 나뭇가지들과

    거기에 달린 비를 담은 열매들

    물안개에 가려 민낯을 다 보여주지 않은 습지와

    새소리


    고요한 곳이었다. 안개와 구름에 가려 그 넓이가 어떤지, 도대체 그 끝엔 무엇이 있는지 가늠할 수 없는 곳. 그곳은 고인 물을 뚫고 올라온 노란색 풀들과 새들의 안전한 자리였다. 우리는 난간에 바짝 서서 습지를 바라보았다.


    후두둑


     드디어 구름 비를 뿌린다. 고인 물 위에와 나무 위에. 나의 초록색 우의 위에도 비를 뿌린다. 꼭 우리가 습지에 닿을 때까지, 그러니까 클라이맥스까지 기다렸다가 뿌리는 비 같았다.


    

    이제 내려가자. 아까랑은 다른 계단길을 미끄러지듯 내려온다. 이 계단이 800개라던가, 아찔한 경사에 비까지 내리니 이건 걷는 건지 미끄러지는 건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길 위에 올라온 달팽이는 구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하며 잠깐 멈춘 사이에도 숲은 우리를 재촉한다. 얼른 내려가라고, 비가 더 많이 내릴 거라고.


    아까 봤던 송아지  웅크려있다가 폴짝 뛰면, 고 조그만 아기가 나를 바라보다 말고 깡총 뛰며 놀란다. 그게 귀여워 또 그 앞에 오래 무르 이번에는 비가 우리를 재촉한다. 어두워진다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물에 목욕이나 하라고.


    목욕 생각을 하니 달팽이도 송아지도 귀찮아진다. 젖은 우의를 벗어제끼고 차 안으로 홀라당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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