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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Aug 31. 2020

낯섦을 익숙함으로 만드는 일

    스물한 살 때 혼자 오사카에 갔었다. 4박 5일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혼자 가는 첫 해외여행이었 만큼 많이 설렜고, 많이 긴장했었다. 그때 내 휴대전화는 2G 폰. 나는 배낭에 넣어둔 여행책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보는 건전한 아날로그 방으로 그곳을 여행다. 


    욕심이 많은 나는 여행책에 소개된 오사카 근처 도시들 닷새 동안 다 다녀보고 싶었다. 고베, 나라, 교토 같은 도시들. 그러면서도 숙소는 오사카 한 곳에만 잡아두었으니 나의 동선은 굉장히 하드코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오사카-나라-근처 소도시-다시 오사카

    오사카-고베-근처 소도시-다시 오사카

    오사카-교토-근처 소도시-다시 오사카


    이런 식으로. 아, 그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며칠을 앓아야만 했다. 으이구, 그 욕심이 문제야. 스물한 살의 나 가보고 싶은 곳엔 꼭 가야 했다.


ⓒTyler Nix on unsplash


    그날도 나는 일찍부터 숙소를 나왔고 늦은 저녁까지 열심히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지쳐서 벤치에 앉아 잠깐 쉬고 있는데, 큰 무리의 청년들이 어느 순간 내 앞에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상기된 표정으로 들썩거리며 한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 무리는 점점 길어졌고, 어디선가 경찰들은 바리케이드를 치며 그들의 행진을 도왔다. 고베 역으로, 그러니까  돌아가는 길은 삽시간에 사라져버렸다.


    벙벙하게 벤치에 앉아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 큰 무리에 섞였 그들이 걷는 방향으로 걸었다. 그 길밖에 없었다. 옆에서 걷는 학생에게 지금 우리가 어디에 가고 있냐고 물었지만 그들은 나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마 의사소통의 문제가 있었겠지.)


    그렇게 삼십 분을 걸었다. 내 앞의 앞의 앞에서 우와, 하는 감탄이 들렸고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표정은 점점 더 달아올랐다. 드디어 그 감탄의 공간에 다다랐을 때, 나 역시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우와, 장난 아니다! 그 길의 끝, 많은 청년들이 무리 지어 향했던 공간에는 웅장하고 화려한 불빛이 끝없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날은 고베의 빛 축제인 루미나리에가 시작되는 첫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빛을 온전히 누리기에 나는 정말 피곤했다. 숙소에 돌아가고 싶었다. 딱딱한 신발을 벗고 침대에 발라당 눕는 게 간절했다.


    큰 무리는 휘황찬란한 길이 끝나고 나서야 나를 놓아주었고, 역으로  수 있었다. 전철 안, 빽빽이 선 사람들 사이에 서서 뻣뻣해지는 다리를 곧추세우며 피곤하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되뇌었는지 모르겠다.


    러고 난 다음 날, 지난 사흘과는 달리 나는 늦게까지 자고 일어났다. 어기적거리며 숙소를 나와 교토로 갔다. 교토에서는 아무 버스나 탔고, 마음이 드는 동네가 보이면 내렸다. 배가 고프면 근처에 있는 적당한 식당에 들어가 천천히 식사를 했다. 그 옆에 있는 느리고 차분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다시 어기적거리며 동네를 걷다가, 아무 버스나 올라타고 내렸다. 혹시 여행은 이렇게 하는 거였을까? 특별한 목적지도, 꼭 먹어봐야 하는 음식도 없이. 사람들을 관찰하고 동네를 휘적휘적 걸어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해버렸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무언가에 홀린듯 여기저기 바쁘게 다니지 않아도, 그냥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여행은 여행일 수 있구나. 일본 여행의 끄트머리에서야  나에게 맞는 여행법을 찾아낸 것이었다.


루미나리에, 고베 ⓒosaka-info

   스물한 살, 첫 번째 해외여행에서 찾아낸 이 여행법은 지금까지도 별 탈 없이 나와 함께 지내고 있다. 이스탄불에서도, 프라하에서도,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도.


    결국 제주도에서도 그냥 살고 있다는 소리이다. 아까 먹은 저녁 설거지가 개수대에 쌓여있고, 데려온 강아지 털이 선풍기 바람여기저기 휘날리고.  마른 빨래를 걷지 않고 두었다가 그대로 입고 나오는 일. 그러다가도 휙, 차를 타고 바다에 나가는 일. 늦게까지 TV를 보다가 다음날 낮이 돼서야 눈을 뜨고, 아이씨, 오늘도 늦게 일어났네, 해버리는 일. 다이소에서 환불해달라 못해주겠다, 하며 실랑이하는 소리를 제주도 사투리로 듣는 일. 조용한 오름이나 다녀올까?, 하는 말에 그래 가자, 하는 일. 골목의 검은 돌담과 야자수에 익숙해지는 일.


    그래요, 우리의 모든 일상이야말로 진정한 여행이지요!, 라고 말하기엔 아직 좀 레벨이 안 되는 것 같으나, 어쨌든 나 제주도 여행은 그런저런 평범한 날들과 익숙해지고 있는 모든 것들로 채워지고 있다. 여행이란 여전히 삶을 사는 것. 몇 년이 지나 이번 여행을 기억해 낼 때 특별할 건 없었지만 어쩐지 제주도가 친근하고 익숙하다는 기분이 든다면 안도할 것 같다. 지난 여행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 제주도 여행도 잘 해냈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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