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니스에서 카이르완까지 가는 길은 황량했다. 거칠고 쓸쓸한 흙색 땅, 그 위에 난 길을 차로 달리는 동안의 하품 몇 번, 지루함. 나는 스르르 선잠에 들었다.
잠에서 깼을 땐 여전히 흙색 땅 위였지만, 그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새콤한 딸기 냄새가 온 땅에 진동하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보니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모를 과일 장수가딸기를 잔뜩 쌓아놓고 팔고 있었다. 튀니지 딸기는 향은 무진장 좋지만 그 맛은 한국 딸기의 십 분의 일도 안 된다는 얘기를 들었으면서도, 나는 딸기를 두 봉지나 샀다. 검은 봉지에서 새어 나오는 새콤한 딸기 냄새를 맡으면 카이르완까지 가는 길이 좀 수월해질 것 같았다. 그리고 정말 딸기 냄새는 차 안에서의 시간을 한결 나아지게 했다. 호텔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저 딸기를 씻어 먹어야지, 라고 생각하면 입안에 침이 고였다.
그렇게 딸기 냄새에 취해있다가 문득 창밖을 바라보니 흙색 땅은 회녹색 나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니, 그건 그냥 회녹색이 아니라 녹색 이파리 위에 은빛으로 반짝이는 윤슬이 내려앉은 것만 같았다. 황홀했다. 저 나무들은 올리브나무. 나는 코로는 딸기 냄새를, 눈으로는 올리브 냄새를 맡았다. 끝없이 펼쳐지는 회녹색을 마음에 담았다. 그때부터 나는 올리브나무를 사랑하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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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올리브나무의 황홀한 빛이 아니라 끝없이 펼쳐지는 올리브 밭의착실함을사랑하게 된 것일 테다. 이런 류의 사랑은 튀니지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스무 살에 인도를 여행할 때도 나는 그곳의 착실함과 사랑에 빠졌다. 바라나시행 기차 안에서 바라본 풍경이 바로 그것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지평선, 그 광활한 땅 위에 앉은 생명들. 허름한 집들과 그 속의사람들, 떠돌이 개들, 소들, 다시 이어지는 초원. 그 풍경은 단조로웠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나는 역에서 산 망고를 손으로 주물러 먹으면서도 눈을 창에서 떼지 못했었다.
스리랑카의 어느 산마을을 여행할 때에도 그랬다. 회백색 구름은 내가 여행하고 있던 마을을 삼켰다가 뱉어내기를 여러 번 했었는데, 구름이 마을을 삼킬 때면 나는 가만히 서서 작고 차가운 물방울들을 온몸으로 맞곤 했다. 물방울들은 내 발가락 사이를 드나들었고 머리카락을 적셨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가 으슬으슬한 구름 속에서 나오면 밭에서 찻잎을 따는 사람들의 여전한 모습을 보며 안도했다. 그 사람들은 구름 속이든구름 밖이든 신경 쓰지 않고언제나처럼 찻잎을 따고 있었으리라.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참착실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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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분다. 하루 종일 가만히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건 뒤숭숭한 일이었다. 태풍에 쓰러진 나무와 가로등, 떨어져 나간간판과 거친 파도의 사진들을뉴스로 보니 더욱 그랬다. 좋아하는 고구마를 삶아 먹어도 입맛이 없었다. 나는 다시 거실로 나가 두 무릎을 감싸 안고 창가에 앉았다. 퍼붓던 비는 그쳤지만바람은 여전히 세서 야자수들을 흔든다. 풀들은 아예 벌러덩 누웠다. 하지만 돌담은 꿋꿋했다. 나는 대충 쌓아 올린 것 같은 저 돌담을 툭 건드리면 꼭 와르르 무너질 것이라 생각했었다. 바람 많은 제주도에 돌담이 웬 말이냐고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숙소 앞, 창문으로 건너보는 돌담은 거친 비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있었다. 아, 나는 저것을 닮고 싶었다.
나도 저 돌담처럼 착실해져야지.
허튼 데 없이 찬찬히 살아야지.
웬만한 일에는 유난 부리지 않고,
담담해져야지.
부산한 태풍 속에서도 의젓하고 가만하게 선 저 돌담하고도 나는 곧 사랑에 빠질 것이다.끝없이 펼쳐지던올리브나무와 지평선,꿋꿋했던찻잎 따는 사람들의 착실함을 사랑했던 것처럼. 그런 류의 사랑은 오래도록 머리에 남아내 삶을 바른 데로 이끌어 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