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읽은 시는 꼭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고, 고마웠다. 시의 모든 구절 그런 건 아니고, 조금 어이없지만, '실컷 잠을 자라'라는 구절이 그랬다. 나는 그 구절이 꼭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읽혔다.
"네가 가진 것을 기쁘게 나누어주고, 수고스러워도 내면을 바르게 가꾸고, 소신을 가지고 살도록 노력해. 그런데, 그러다가도, 혹시라도. 잘 안될 땐 그냥 잠이나 자며 나른해져도 된단다."
그리고 방비엥을 생각했다.
라오스에서 지낸 지 여섯 달이 지나서야 방비엥에 가볼 수 있었다. 벌써 십 년 전이다. 수도 비엔티안에서 낡은 관광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150km, 거친 도로를 네 시간 정도 달리면 방비엥에 닿는다. 거긴 비엔티안과는 또 다른 별세계였다. 정말 자연다운 자연, 나무집과 낡은 레스토랑, 졸린 표정의 고양이와 반쯤 벗고 돌아다니는 여행자들의 긴장 풀린 눈. 방비엥에서의 첫날, 나는 그 모든 나른함과 마주했고 곧 그 속에 스며들었다.
그 나른함 속에 스며드는 방법은 아주 쉬웠다. 남송 강이 건너 보이는 아무 카페에 들어가반쯤 누운 채로 라오스식 샌드위치 먹기. 매트리스 속 벼룩 따위에게는 눈길주지 않기. 접시를 다 비우면 이번엔 완전히 드러누워 높은 산 사이로 흐르는 구름 구경하기. 그렇게 단잠에 들었다가 발끝을 스치는 고양이 털에 눈을 뜬다. 오후와 저녁 시간의 경계에서, 다시 거리로 나와 슬렁슬렁 걷다 보면 나도 다른 여행자들처럼 벌써 오랫동안 방비엥에 머문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저들도 나처럼 오늘 아침 이곳에 도착한 것일 수도.
다음 날에는 자전거를 빌려 마을을 다녔다. 캐나디안 커플과 깊은 동굴에 가 오래된 석상을 보았고, 돌길을 달려 검은 계곡에도 다녀왔다. 아, 오늘 좀 고됐다 싶어 일찍 잠들었다. 그다음 날에도 여전히 너무 고되다 싶어 하루 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스콜이 지나 촉촉해진 거리에 구름 냄새가 피어오르고, 나른함.풀리는 눈. 다시 샌드위치. 단잠.
우린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하고 싶었고, 소외된 이에게 우리의 것들을 기쁨으로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소신을 지키며, 되도록 바르게살고도 싶었다. 하지만 많은 날 그렇게 살지 못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 자괴감을 불러들였고 스스로 괴로워했다.잠잘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아, 어쩌면 불면증이었을까.
그렇게 지친 마음을 가지고 제주도에 입도했다. 한여름에서 늦여름으로, 결국에는 이른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을 섬에서 보내며 많은 걸 하고 싶었지만 그러질 못했다. 많이 졸려서. 바다에 가고, 오름에 오르는 날도 있었지만 그보다 많은 시간을 숙소에서 자는 데 보내고 있다. 처음엔 이게 잘하는 일인지 아닌지 확신이 없었으나 어쨌든 불면증이 가시고 졸음이 오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기로 했다. 아마 그때쯤에 나는 시를 떠올렸던 것 같다. '아니면 실컷 잠을 자라'라는 그 고마운 구절을. 그리고 방비엥을. 그 나른함을. 그 단잠을. 그래, 좀 자도 되겠다.
멋진 인생을 살아라.
하지만 지칠 때면 그냥 잠이나 실컷 자는 것도 좋을 일이다.
제주도는 잠들기 좋은 곳이지 않은가.
방비엥에서의 짧은 단잠이 남은 라오스에서의 삶을 살아갈 힘이 되어주었던 것처럼,지금 제주도에서의 시간도 우리가 꿈꾸는 인생을 살아가게 할 넉넉한 힘이 되리라. 그 힘으로 우리는 또다시 고된 삶을, 우리의 꿈을 살아 내리라.
덧붙이며,
언젠가 다시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되다면 가장 먼저 라오스에 가야지. 아직 못 가본 유럽의 어느 도시나 남미 대륙 저 끄트머리의 도시 말고. 전에 오래 머물렀던 라오스, 그때 잠깐 들렸던 방비엥으로. 그 나른한 단잠의 세상으로.그때가 오기까지 다시 열심히 삶을 살아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