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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Sep 22. 2020

이모 같은 오름

    여름의 끝은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왔다. 느닷없이 차가워진 바닷물에 발목이 시리고 나서야 그 끝을 알아챘으니까. 그러고 보니 목을 스치는 바람결이 선선했다. 그래, 바람이 불었다. 그날은 유독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다.


    제주도엔 매일 하루씩 올라도 남을 만큼의 오름이 있고 숙소 가까운 곳에도 오름직한 곳이 많았지만, 우리는 조금 멀리 나가기로 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백약이 오름이 오르기도 편하고 그 모습도 참 예쁘다고 자주 말해주었다. 내비게이션으로 검색해 보니 옹포리에서 오름까지 한 시간 삼십 분. 이 정도야 뭐.


    백약이 오름은 도로 바로 옆에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고운 오름에 반가움보다는 당혹스러움이 먼저 들었고, 당혹스러움 뒤엔 벅차오름이 우리를 찾아왔다. 오름은 정말 예뻤다. 쭉 뻗은 완만한 계단, 무릎께까지 자란 풀들과 곳곳에 무리를 지고 자란 삼나무들, 분화구를 순하게 두른 정상의 곡선까지. 백약이 오름은 내가 늘 상상해오던 오름의 모양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오르다 뒤를 돌아보면 주황색 꽃밭이 내려다 보였고, 다시 조금 더 올라보면 이번엔 저 멀리 다른 오름들이 내다 보였다. 바람은 점점 거세게 우리를 위로 몰았지만 뒤로 보이는 세상이 너무 좋아서 자주 멈췄다. 그렇게 계단길이 끝나면 조금 가파른 언덕길이 이어졌다. 꼭 저 언덕을 넘으면 다른 세상이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언덕을 오를 땐 바람이 더욱 거셌는데, 몸을 동그랗게 말고 걷지 않으면 바람에 나뒹굴고 말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나는 모자가 날아갈까 끈을 더욱 조였고, 티셔츠 사이로 드나드는 바람에 팔뚝 돋은 닭살을 문질러댔다. 그렇게 조금 걸으니 고른 땅이 나왔다. 계단길에서 뒤돌아 보던 것과는 또 다른 세상. 오른쪽 바다 위로 성산일출봉이 보이고, 천천히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네모난 진녹색 밭과 밭들. 밭 사이의 경계를 지어주는 수목들이 단단하게 수놓아져 있다. 시선을 더 멀리 두면 거기엔 이름을 모르는 오름들 여러 개가 봉긋이 솟았다. 우리는 고른 땅 위에 나란히 앉았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뒤집어질 듯 휘날렸지만 마음만은 평온. 빠르게 흐르는 구름들과 진녹색 풍경, 멀리 보이는 바다와 마주 앉아 오랫동안 있었다. 한기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은 정상이 아니다. 우리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분화구를 왼쪽에 두고 순한 곡선을 따라 걸었다. 조금 더 걸으면 오름의 정상이 나온다 했지만 정상에는 오를 수 없었다. 몇 주 전부터 정상은 오름의 회복을 위해 출입이 금지되었다는 현수막이 바람을 버티고 서있었다. 나는 그게 아쉽기보다는 참 고마웠고 그 짧은 기간 동안 과연 오름이 회복될 수 있을까, 염려스러웠다. 그래, 오름아. 좀 쉬어라. 곪은 데에 깨끗한 새살이 돋고, 움푹 파인 덴 빗물이 가져다주는 고운 흙으로 잘 덮어라. 그러나 급하지 말아라. 천천히, 천천히 회복되어라.


    분화구를 한 바퀴 돌아 다시 계단길. 이번엔 내리막길이다. 우리는 아까보다 잦아든 바람과 나른한 마음과 함께 오름을 내려왔다. 다 내려와서는 백약이 오름은 꼭 이모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혼내지 않고, 언제든 놀러 오라고 말씀해 주시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시는 엄마의 다정한 언니. 언젠가 생긴 붉은 상처를 마음에 가지고 계시지만 그 얘긴 전연 하지 않으시는 이모 같단 생각을 왜 했을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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