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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Sep 24. 2020

소라게

    남편은 제주도의 바다를 더 좋아고, 나는 제주도의 오름을 더 좋아했다. 그 경계가 모호해서 바다든 오름이든 자연이라면 다 좋아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사실은 그랬다. 그래서 나는 남편이 수영을 할 수 없는 날이나 늦은 밤에 바다로 나가자고 할 때마다 조금 귀찮았다.


    아무튼 늦은 밤, 바다에 가면 나는 평평한 땅에 쪼그려 앉아 있거나 부드러운 모래사장 위에서 발로 그림을 그리거나 했고, 남편은 휴대전화를 손전등 삼고 바위 사이를 자주 비추어 보며 바다를 탐험했다. 그러다가 남편이 나를 부르면 그제야 어기적 일어나 그리로 갔는데, 거기엔 게가 많다. 엄지손톱보다 더 작은 것들이 빠르게 움직이는 걸 보고 처음에는 갯강구인 줄 알고 싫어했지만 사실 그건 진짜 빠른 게였다. 어느 날엔 내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하얀 게를 잡는 날도 있었다. 그 게는 좀 둔해서 잡았다가 놓아주면 휘리릭 모래 속으로 들어가 버리지 못하고 뚱하게 그대로 앉아 있다가,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서서히 모래 속으로 가라앉았다.


    미니 게들이나 둔한 게들보다 더 흔했던 건 소라게였다. 보말이나 작은 소라인 줄 알고 바위에서 떼어 들면 거의 절반은 소라게였다. 정말 작은놈은 새끼손톱 반의 반의 반만 했고 제법 크다 싶으면 엄지손가락만 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게 진짜 소라게 크기인지 아닌지는 전연 알 수 없었다고나 할까. 어떤 게는 자기 몸보다 두 배가 더 큰 소라껍데기를 집 삼아 살고 있기도 했으니까. 나는 그런 녀석을 만날 때면 속으로 '야, 너 욕심이 좀 세다. 네 몸에 맞는 집을 가져야 너도 편하지 않겠냐?'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소라게는 자기 몸에 맞지 않은 큰 집을 이고 낑낑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둔했고, 빠릿빠릿하게 도망가지 못했다. 굼떴다.


    그 모습이 꼭 내 모습 같다는 생각을 한 건 그 소라게를 만나고 며칠이 지나서였다. 나는 전에 아이들을 가르치고, 학부모들과 상담을 하고, 또 때로는 젊은 청년들을 이끌어야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일은 여러모로 참 어려운 일이었다. 나의 좁은 마음을 넓히지 못해 괴로워하는 날들이 많았다. 간혹 들려오는 나에 대한 오해들에 대해 입을 다무는 일도 힘들었다. 화가 나도 화를 낼 수 없었다. 선한 표정과 미소로 사람들을 대하고 인정 많은 척 굴어야 했다. 하지만 그 일을 하면서 얻는 것도 많았다. 아이들의 사랑, 얕은 존경, 사람들의 관심, 깊은 사명감, 높은 자존감 같은 것들.


    스무 살 때부터 그 일을 했고 십 년이 지나 멈췄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했다 싶다. 그 일을 하면서 배운 게 많지만 그때의 어린 내가 불쌍하기도 한 건, 새끼손톱 반의 반의 반만 한 소라게가 자기보다 몇 배는 더 큰 소라껍데기를 이고 다닌 것 같아서. 실체는 아주아주 작으면서 큰 척하며 산 것 같아서. 나는 그때의 내가 조금 불쌍하다. 그리고 약간 재수 없기도 하다.


    일을 그만두고 오래 우울했다. 소라게에게서 소라껍데기를 빼앗아버린 누군가를 향하여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작은 실체 위에 얹힌 커다란 껍데기 같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에서 벗어난 것에 고맙다. 조금 불쌍하고 약간 재수 없기도 했던 겉모습 대신 원래의 모습과 그 분수에 맞는 소라껍데기를 고를 수 있게 된 것은 또 다른 축복.


    어느 제주도의 바닷가에서 만난 그 어리석은 소라게를 도우려고 자기 집에서 억지로 쏙 빼내어 다른 집에다 이사시킬 순 없다. 그럼 아마 죽지 않았을까? 난 소라게를 죽이기 싫다. 그냥 그 녀석을 내려다보며, 이렇게 생각할 뿐. '언젠가 너도 깨닫게 될 거야. 큰 집에서 빠져나와 너한테 딱 맞는 집으로 이사할 날에 아아, 자유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그러고 나서 우와, 진짜 평안하다, 하 감탄하게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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