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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Sep 27. 2020

노루 앞에서

    제주도에서의 한 달을 위해 국자도 챙겨 오고, 자전거도 챙겨 오고, 수영복 두 벌이나 챙겨 왔지만 정작 운동화는 집에다 두고 왔다. 까먹어서. 하지만 불편함은 없었다. 오름을 오를 때나 올레길을 걸을 때 남편은 싸구려 슬리퍼를, 나는 낡은 스트렙 샌들을 신고 다녔다. 질퍽한 흙길에서나 미끄러운 바위 위에서도, 가파른 오름길에서도 우리는 충분히 날랬다. 그랬던 우리가 운동화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각한 건 한라산 입구에서였다. 우리의 발을 묶은 한 줄 안내글. '구두나 슬리퍼를 신고 오를 수 없습니다.'


    아, 우리 운동화가 없구나. 그 뒤로 며칠이 지나 우리는 만 원짜리 운동화를 샀고, 다시 한라산으로 향했다. 너무나 좋은 날이었다. 일 년에 한두 번만 사라오름 산정호수에 물이 찬다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신비롭고 예쁘다는데, 그때가 꼭 이때라는 것이다. 우리는 백록담까지는 못 가더라도 물이 가득 찬 사라오름만은 꼭 보자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라산은 차분했다. 엄하지 않고 인자했다. 우리는 말 수를 줄이고 천천히 산길을 올랐다. 차 소리가 사라지고, 사람 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땐 산과 숲의 기운에 마음이 묵직해지는 것 같았다. 그 묵직함이 무릎까지 내려왔을 땐 나무의자에 앉아 유부초밥을 꺼내 먹었다. 속이 차고 무릎이 가벼워지고, 다시 산을 오르고 또 오르고. 높이 오를수록 우리 사이는 가까워지고, 애틋해지고. 그렇게 세 시간 만에 사라오름 산정호수에 닿았다. 차고 맑은 호수에 발을 담갔을 때가 한라산의 절정이었다. 절정에 취해 잘 찍지 않는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이번엔 내리막길이다.


    긴장이 풀린 우리는 많이 피곤했다. 발이 자꾸만 앞으로 쏠 엄지발톱이 욱씬댔고, 계단을 내려올 때마다 종아리가 후들거렸다. 물이 찬 사라오름을 봤다는 건 크고 분명한 기쁨이었지만 그랬기 때문에 돌아가는 길은 허무했다.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짜증을 냈다. 다툼이 생겼다. 차분했던 한라산은 민망할 정도로 조용고, 인자하기만 했던 숲은 쉽게 출구를 내주지 않는 고약한 숲이 되어버렸다. 꺼내 먹을 유부초밥도 없다. 우리를 스치는 다정한 커플들의 모습이 괜히 밉다.


    우리는 열 걸음 정도 떨어져서 터덜터덜 산길을 걸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적막을 뚫는 소리가 들다. 우리 왼쪽으로 빼곡한 풀숲이 푸쉬쉬댄다. 곰인가. 곰은 지리산에 있겠지. 우리는 우두커니 서서 알지 못하는 동물의 모습이 드러나길 기다렸다. 아, 고운 눈과 쫑긋한 귀와 매끄러운 털의 노루. 엄마 노루와 아기 노루였다. 노루는 빼꼼히 고개를 들고 우리를 쳐다보았다. 도망도 안 가고 검은 눈동자를 굴리지도 않고 있다가 점점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리고 우리는 노루 앞에서 다시 붙었다.


ⓒMagda V on unsplash


    가끔은 그래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다투고 미워하다가도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 노루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풀어버리기. 정말 화가 나서 당장 다다다닥 따지고 싶을 때에라도 까짓것 그냥 다 덮어버리기. 날카로운 말투와 짜증에 잠깐 졌더라도 아예 지지는 않기. 그냥 화해해버리기. 그날 갑자기 나타난 노루 앞에서 우리는 화해다.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온 노루 얘기를 하며 서로에게 냈던 짜증과 다툼을 덮어버렸다. 그제야 산은 다시 신비롭고 인자해진다.


    각해보니, 아마 우리는 노루가 아니라 작은 개미 한 마리가 발등을 기어올랐어도 화해버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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