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산방산이 왜 그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그 산은 오롯이 선 산, 육지의 여느 험한 산처럼 녹록하지 않은 위엄이 내려앉은 곳이다. 나는 그곳에 갈 때마다, 그러니까 차로 그곳을 한 바퀴를 돌아보거나 사람 없는 산 밑동 길을 걸어볼 때마다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탐방로를 따라 산 깊은 데까지 파고들지 못해도 괜찮았다. 그저 산 가까운 데에 서 있는 것만으로 시선은 높아졌고, 마음은 겸손해졌다.
산방산은 바다를 마주 보고 있는 쪽보다는 그 반대쪽 모습이 훨씬 예쁘다. 바다 쪽엔 카페들과 가게들, 가볼만한 사찰과 넓은 주차장이 있어 구경하기에는 좋지만, 너무 북적인다. 바다 반대쪽은 주차를 하기도 애매하고 주변에 돌담과 밭, 멀뚱한 건물과 편의점 하나가 있을 뿐이라서 재미는 없지만, 조용하다. 산방산 옆 길가에 차를 대 놓고 마시는 천 원짜리 편의점 커피는 말 그대로 달았다.
잔비가 내리던 어느 날, 산방산 가는 길에 모슬포항 근처 작은 동네에 들린 적이 있다. 그 동네엔 빵집 두 개가 나란하게 있는데, 두 집 다 내가 옛날에 자주 사 먹던 빵을 구워 팔고 있었다. 먼저 들린 집은 빵에서 쉰 내가 나서 한 입도 못 삼키고 버려야 했고, 다른 집은 값도 싸고 맛도 옛날 그대로라 그 후에도 두어 번 더 찾아갔었다. 아몬드 빵과 바나나 초코 빵, 붓세 같은 단 빵들. 나는 그 앞에서 아이처럼 고민하고 서있다가 결국 몽땅 다 사들고 뿌듯한 마음으로 가게를 나왔다. 빵이 가득 담긴 누런 종이봉투를 무릎 위에 안고 산방산을 보러 가는 길은 제주도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 중 하나였고.
잔비는 굵어지고 땅이 제법 촉촉해졌을 때, 우리는 산방산을 다 보고 동쪽으로 향했다. 곧은 도로를 달리다 말고 아까 들린 동네보다 훨씬 작고 오래된 마을로 들어섰다. 그곳은 무르익은 제주집들이 모여 앉아 도란도란대는 마을. 지붕들은 비를 모아 두었다가 각자의 리듬으로 물 떨어지는 소리를 냈다. 우리는 그 소리를 듣느라 비에 옷이 젖는 줄도 몰랐다.
마을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예쁜 찻집이 있어 들어갔다. 할머니와 아버지와 딸이 함께 살며 운영하는 찻집은 어딘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냈다. 거기에서 차 한잔 마시고 그 집 마당으로. 태어난 지 몇 주 안 됐다는 강아지들이 그곳을 휘젓고 있었고, 그중에 두 마리는 내 발가락을 물고 놀았다. 마당 한가운데 심긴 널따란 나무와 할머니의 무심한 인사. 걱정스럽게 자기 강아지들을 바라보는 엄마 개의 묶인 표정과 앵앵거리는 늦여름 모기. 비는 진작 그쳤으나 비를 담아두었다가 떨어뜨리는 지붕 물소리에 아직도 비가 오나, 하며 올려다보는 흐린 하늘.
오렌지빛 지붕의 찻집을 나와 차를 대 둔 곳으로 향하면서도, 나는 몇 번이나 멈춰 서서 찻집을 돌아보았다. 땅으로 꺼져버릴 듯한 낮은 벽들에게 오렌지빛 지붕은 무척 무거워 보였다. 비가 내려서 그랬던가, 세월이 내려앉아 그랬을까.
하늘이 완전히 갰다. 진노란색 볕이 서귀포를 덮는다. 다시 산방산으로 향한다. 빗물에 젖은 잎들이 햇빛을 반사시키고, 산은 커다란 에메랄드처럼 보인다. 나는 그게 왜 그렇게 좋은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