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미림 Oct 17. 2020

가만히 냅둬도 잘 자라는구나

    꽃화분보다는 꽃다발 선물이 더 좋았다. 화분을 선물로 받는다는 건 뒤따르는 책임감이 무거웠으니까. 물을 주고, 필요하다면 분갈이를 해줘야 하고. 잎이 시들 때마다 아파오는 마음, 그건 죄책감이었다. 그래서 꽃다발이 더 좋았다. 거기엔 어떤 책임감도 죄책감도 없었으니까. 짧으면 한 주, 길면 두 주 정도 꽃의 아름다움만 만끽하면 됐으니까. 시들면 약간의 아쉬움만 남기 쓰레기통에 넣으면 됐으니까.


    이런 생각은 나만의 것은 아니었나 보다. 박완서 선생님의 산문집 <한 길 사람 속>에 이런 구절이 담겨있는 걸 보았다.


    '나도 누가 꽃을 사 왔을 때 가장 기쁘다. 그러나 화분은 꽃보다 덜 기쁘다. 혹시 잘못 가꾸어 죽이게 될까 봐 겁이 나서이다. 비싸 보이거나 까다로워 보이는 화분은 더 싫다. 그런 화분일수록 그걸 선물한 사람이 잘 자라느냐고 안부를 하거나 우리집에 왔을 때 그 화분이 잘 있나 휘둘러보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_p.208


    내가 이 구절 앞에서 속으로 맞장구를 치며 호들갑을 떤 것은 작년 봄에 받은 꽃화분 선물 때문이었다. 그 화분은 비싼 것도 아니고 까다로워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생그럽긴 했어도 그리 예쁜 것도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 번, 흙이 다 젖고도 남을 정도로 흠뻑 물을 주기만 하면 알아서 잘 자랄 거라 했다. 나는 그 말에 묶여 거의 일 년 동안 화분을 돌보았다. 혹시나 물을 주지 못할 땐 강아지 밥을 챙겨주지 못했을 때와 같은 죄책감이 몰려들었다.


    그러다가 한 달 정도 집을 비워둬야 할 때가 있었는데, 나는 그 조그만 화분 앞에서 오랫동안 고민을 했다. 얘를 그냥 두고 가야 하나, 들고 가야 하나. 결론은 그냥 두고 가자. 처음 일주일은 자주 혼자 두고 온 화분 생각이 나서 걱정도 되고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그다음부터는 생각이 안 났다. 할 일이 많았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았다. 그렇게 화분을 잊고 지내다가 집으로 돌아가기 며칠 전부터 다시 화분 생각이 났는데, 나는 은근히 화분이 다 말라죽어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집으로 돌아와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야 베란다로 나가보았다. 화분이 살아있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 앞에 섰다. 화분은 '거의' 죽어있었다. 잎이 시들하다 못해 말라 있었고, 꽃잎도 다 져서 너저분했다. 그러나 내가 '거의' 죽었다고 한 건, 메마른 틈 사이에 한 줄기가, 거기에 가냘픈 꽃봉오리 하나가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넌 여전히 살았구나. 내가 집을 비워두는 동안 너는 집의 적막을 껴안으며 살고 있었구나. 창밖에 내리는 비에 한숨지으며, 여전히 말라있는 흙을 뒤적여 할 수 있는 모든 수분을 끌어당겼겠구나.


    나는 어이가 없었고, 또다시 죄책감이 들었다. 마른 잎을 떼어내고, 주변을 정리하고, 미지근한 물을 화분에다가 가득 부어주었다. 침대에 누워서도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조금 있으면 또 떠나야 하는데, 나는 또 길게 집을 비워야 하는데.


ⓒJohn Fornander on unsplash


    한라산 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도, 큰 도로를 벗어나 외곽으로 조금만 빠져도 귤밭이었다. 현무암으로 쌓아 올린 가슴께까지 오는 돌담 너머로 두껍고 반들거리는 귤나무 잎이 뻗어 나왔다. 귤나무들는 그리 높지도 크지도 않았지만 품은 열매들은 정말 많았다. 나는 귤밭 옆을 지날 때마다 저 열매들이 고운 색으로, 해를 닮은 색으로 순식간에 익어버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얼마나 예쁠까.


    넓은 밭과 많은 나무들과 수만 개의 귤들이 있어도 그 사이를 다니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밭이 워낙 넓어서일까, 아니면 귤나무를 키우는 데 손이 많이 가지 않기 때문일까. 밭은 사람이 아니라 볕과 바람과 비에 의해 관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만 있다면 사람 손 따위는 필요치 않아 보였다. 반짝이는 이파리, 빼곡히 달린 수만의 풋귤들.


    '내 화분처럼 쟤네, 가만히 내버려 둬도 잘 자라는구나.'


     귤밭 앞에서 이번에도 그냥 집에 두고 온 화분 생각이 났다. 여전히 살아서 단비가 내려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면 어쩌나. 집안의 적막을 온몸으로 맞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으면 어쩌나. 나는 또다시 죄책감이 들었지만, 이번에는 화분이 죽기를 바라지 않고 꼭 살아있기를 바랐다.


    내 마음도 화분 같고 귤나무 같기를 바랐다.





















작가의 이전글 그게 왜 그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