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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Dec 19. 2020

다뉴브 강이 빛날 때

부다페스트

    다뉴브 강 쪽으로 기다란 창문이 나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며칠 머물렀다. 강은 가로수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창문은 강 기운을 집안으로 넘겨 보내주었다. 햇살과 윤슬, 강의 냄새, 촉촉한 바람 같은 것들이 창문을 넘고 커튼을 휘저으며 집안으로 들어와 몸에 감겼다. 나는 거실에 놓인 진회색 패브릭 소파(영 찝찝했지만)에 앉아 보이지 않는 강의 기운을 만끽했다. 그 일은 부다페스트에서의 시간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거실을 가득 채우는 햇살의 시간은 짧았다. 햇살은 느긋하게 거실을 선회하는 듯하다 갑자기 휘리릭 창문으로 빠져나갔고, 집안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아, 나는 그걸 못 견디고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집안과 달리 바깥은 여전히 밝은 오월이었으니까.


    'ㅁ'자 모양의 오래된 아파트 건물을 빠져나와 다뉴브 강으로 나갔다. 역시, 햇살은 여전히 새하얗게 눈부셨고 사람들은 빛을 받으며 만족해하는 모습이었다. 강 건너에 보이는 국회의사당과 부다페스트 성은 어젯밤 야경과는 달리 굉장히 차분한 모습이었는데 나는 그 모습이 더 마음에 들어 그 앞에 잠깐 앉아 있었다. 트렘을 탔고 겔레르트 언덕으로 갔다.


    언덕 근처에 다다랐을 때 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비를 피해보겠다고 입고 있던 남방을 벗어 뒤집어쓰고 달렸다. 아무 버스 정거장에나 들어가 빗물을 털고 있는데 눈 앞에 초록색 철교, 자유의 다리가 보였다. 내가 서 있는 정류장을 기준으로 다리 쪽 하늘은 새파랗게 개어 새하얀 햇빛을 쏟아내고 있었고 반대쪽 하늘은 여전히 먹구름이 잔뜩 껴있었으니, 자유의 다리는 마치 영험한 산이나 신성한 상징처럼 보였다. 나는 그런 다리에 함부로 가닿고 싶지 않았고, 남방을 뒤집어쓴 채 여전히 비가 내리는 쪽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비 내리는 광장과 골목을 다니다가 코스타 커피에 들어가 따뜻한 라떼를 마시며 몸을 녹였고, 작은 잡화점에 들어가 조금 민망한 나무 인형을 보며 킬킬 웃었다. 화장실이 급해서 아무 건물에나 들어갔는데 거긴 차분한 예술 창작소 같은 곳이었다. 예쁜 그림들과 손 때 묻은 나무 의자 몇 개가 통로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어디선가 희미한 클래식이 들려오는 곳. 공짜 화장실을 이용하고 나서도 오랫동안 건물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다. 통로, 그림 몇 점이 놓인 노란 벽에 기대어 희미한 음악을 들었다.


    바깥에 내리던 비가 그쳤다. 이젠 용기를 가지고 천천히 자유의 다리로 가자. 다리를 건너 부다페스트가 시작된 언덕, 겔레르트 언덕에 오르자. 나는 괜히 긴장하며 초록색 철교를 건넜고 조금 더 가 있는 겔레르트 언덕에 올랐다. 언덕을 오르는 동안 나는 헝가리 사람들이 겪었 이데올로기적이고 종교적이었을 갈등들, 그 시절의 아픔을 곱씹으려고 노력했다. 적어도 언덕을 오를 때는.


    사람들은 성 겔레르트를 기억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이 언덕에 주었다. 성 겔레르트는 자기가 가진 신념을 지키촘촘히 못이 박힌 통 안에 갇혔고, 사람들은 그 통을 이 언덕에서 다뉴브 강으로 굴려버렸다고 한다. 그 순교하게 한 것도, 그 순교를 기념하는 것도 '사람들'이었다. 아이러니하다.


    언덕 꼭대기에서 다뉴브 강을 내려다볼 땐 허무할 정도로 그 모든 노력이 사그라져버렸다. 언덕에서 바라보는 부다페스트는 아름다웠다. 고운 색 물감용해서 점묘법으로 그린 섬세한 그림 같았다. 나는 핫도그를 사서 벤치에 앉아 먹으며 눈 앞에 펼쳐진 전경도 같이 목구멍으로 삼켰다. 그 다음엔 난간에 기대 서서 다뉴브 강을 바라보았다. 모든 도시는 모든 역사를 보아 알면서도 그저 묵언으로 안아주고 있는 강들에 의해 지켜지고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맑게 갠 하늘의 석양 색은 사랑스러웠고 다뉴브 강은 낮 때보다 더 빛났다. 나는 그 빛이 내게도 스며들길 가만히 바랐다.


2018, 부다페스트, 헝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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