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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Dec 21. 2020

그 버거는 이곳에 없어요

상하이

    주재원 이모부 덕에 시작한 상하이 여행이었고, 평생 해볼까 말까 한 일정들이 이어졌다. 푸동 야경이 보이는 초고층 호텔에서 카푸치노를 마시고, 과연 사람의 힘일까 싶은 어마어마한 악력의 안마사에게 고급 마사지를 받았다. 상하이에서도 비싸다는 레스토랑에 가서 훠거를 먹었고, 서커스도 보고, 갖고 싶은 걸 골라보라는 이모 말에 눈이 휘둥그레지기도 했다. 나는 수많은 예쁜 물건들 앞에서 결국 얇은 실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모가 이런 건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으니 다른 걸 골라보라고 했지만, 난 그게 제일 예뻤다. 저녁마다 우리는 커다란 참외인지 멜론인지 모를 사각거리는 과일을 사 먹었고, 택시를 타고 화려한 거리로 나가 산책을 했다. 그렇게 많은 걸 누리는 여행이었지만 사실 내가 정말 원했던 건 따로 있었다. 나는 그걸 이모한테 말하지 못했다. 조카라는 이유로 이모 돈을 펑펑 쓰고 있었고, 이모는 나를 위해 이미 많은 일정을 계획해 둔 상황이었다.


    상하이는 내가 여태껏 가보았던 중국 오지 여행지나 소수민족 마을과는 정말 많이 달랐다. 난징동루 거리는 세련되면서 또 고풍스러운 쇼핑가였는데, 밤에 거길 걸으면 마치 따뜻한 크리스마스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다. 예원은 와이탄이나 난징동루 거리와는 또 다른 상하이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거리 곳곳에 예술작품 같은 사탕을 만들어내거나 나무를 깎고 전통 그림을 그리는 장인들이 있었고, 신기한 음식들도 많이 팔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갔을 땐 가슴이 웅장 해지는 기분이 들어 오랫동안 그 앞에 머물렀었다. 좁은 골목을 잇는 수많은 예술가들의 가게를 지날 때는 정신이 좀 없긴 했지만, 섬세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가의 손끝을 볼 땐 정말 크게 감탄했다. 하지만 그토록 신나게 여행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정말 원하는 일을 실행할 틈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기회가 왔다. 이모가 어학원에 간 날이었다. 나는 이모집을 빠져나와 집 근처 번화가로 향했다. 이모 없이 횡단보도를 건너는 일은 굉장히 아슬아슬한 일이었다. 도대체 왜 8차선 대로에서 자동차 좌회전 신호와 보행자 신호가 동시에 켜지는지, 이 도시 교통의 무질서함을 욕하면서도 차에 치어 죽지 않으려고 몸을 사렸다.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켜보고 싶어도 신호가 잡히지 않아 답답했다. 그래도 나는 갈 길을 멈추지 않았다. 얼마를 걷다가 드디어 내가 원했던 것을 파는 가게, 그러니까 맥도날드를 찾아냈다.


    세계 어느 도시에 가도 맥도날드의 모습은 비슷비슷했다. 물론 뉴델리의 맥도날드에는 비프 버거 대신 카레향이 진한 치킨 버거만 있었고, 오사카의 맥도날드는 양이 적은 햄버거를 팔고 있었으며, 비엔나의 맥도날드는 버거보단 커피와 디저트가 훨씬 맛있다는 점은 달랐지만. 적어도 내부의 분위기는 같았다. 상하이 맥도날드도 다를 게 없었다. 비슷비슷한 버거들과 파이들, 아이스크림들의 그림이 내가 읽을 수 없는 중국어와 함께 메뉴판에 걸려 있었다. 나는 카운터 직원에게 다가가 조금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내가 원하는 걸 주문했다. 매콤한 치킨 패티와 마요네즈, 잘 익은 토마토가 들어간 버거를. 상하이에서 왔을 법한 이름을 달고 있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 버거를.


    "상하이 스파이스 치킨 버거 플리즈."


    직원은 그런 버거는 여기에 없다며 미안하지만 다시 한번 말해줄 수 있겠냐 물었다. 나는 조금 더 주눅이 들었고 아까보다 작은 목소리로 다시 한번 말했다.


    "상하이 스파이스 치킨 버거..."


    직원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제 알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맥 스파이스 치킨 버거?'라고 반문했다. 나는 그게 도무지 어떤 버거인지 알 수 없었지만 더 이상 직원을 귀찮게 하면 안 될 것 같아 그냥 다음에 오겠다 말하고 호다닥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러곤 얼른 이모 집으로 돌아갔다.


    그 뒤로 며칠을 더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서야 나는 맥도날드 직원이 말했던 맥 스파이스 치킨 버거가 내가 찾던 상하이 스파이스 치킨 버거와 같은 메뉴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 그때 더 적극적으로 물어볼걸... 그러지 못했던 걸 후회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대신 상하이에 꼭 다시 한번 가야지 다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모가 상하이를 떠나 다른 도시에 간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미 상하이의 많은 걸 보고 또 먹어봤다 해도, 가는 데 돈도 들고 오랜 시간도 든다 해도 나는 다시 상하이에 가야 할 명분이 있다. 그러니까, '상하이 스파이스 치킨 버거 먹으러'라는 명분.


2009, 상하이,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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