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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Mar 15. 2019

내가 당하는 건 괜찮아, 하지만

결혼, 위로






    내가 남편과 결혼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착한 성품 때문이었다.


    성품이 착한 사람은 착한 말을 한다. 남편의 입에서 다른 사람 험담이 나오는 일은 거의 없고, 비난이나 비하 같은 말들 역시 그의 입에서 멀었다. 그는 남 얘기만이 아니라 자기의 힘든 마음도 쉽게 표현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가 좋아서 결혼을 했지만, 그것 때문에 마주하게 될 답답함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하루는 남편이 저녁을 먹다가, 밝고 명랑해 보이기까지 한 표정으로 오늘 선임한테 한 소리 들었다는 얘기를 했다. 그의 밝은 표정과 말 사이에서 불편한 이질감 같은 게 느껴졌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도통 그런 말을 하지 않는 남잔데, 오죽하면 이런 얘기를 꺼냈을까. 나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남편은 오늘 직장에서 있었던 일을 아주아주 간략하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붙이는 말이, 누구도 잘못한 사람은 없어. 누구도 나쁘지 않고. 내일 아침에 잘 풀어야지, 였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차분은 무슨. 걱정근심을 양 손에 한 움큼씩 쥔 모양으로 그에게로 몸을 바짝 기울였다. 좀 더 자세하게, 그러니까 속 시원하게 말해보라고 채근하면서. 나는 눈이 크다. 나의 감정은 남편과 달리 겉으로 쉽게 드러나고 만다. 남편은 나의 동그랗게 뜬 걱정어린 눈을 보며, 이미 나의 나쁜 상상은 저 멀리 우주 어딘가에까지 닿았음을 짐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나는 정말 괜찮아. 하지만 이 일 때문이 자기가 힘든 건 힘들어, 라고 말할 뿐이었다.


    아이고, 이 사람아. 그게 내 마음이야.


    나 역시 똑같다. 내가 당하는 건 괜찮다. 내가 억울하고, 내가 비참해지고, 내가 고생하고, 내가 힘든 것은 견딜만하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당하는 건 이상하게 내가 당하는 것보다 열 배는 더 마음이 아린단 말이다. 나는 하마터면 괜찮다, 괜찮다, 거짓말하지만 말고, 속 시원히 힘들다고 좀 말해!, 라고 남편에게 소리칠 뻔했지만, 참았다.






    내가 그 말을 관둔 이유는, 나를 향한 그의 배려를 무시하는 꼴이 될까 봐 걱정이 되어서였다. 남편은 열심히 자기의 힘든 것을 감추는 (어리석은) 방법으로 나를 배려하고 있었다. 그 방법의 부작용은, 사랑하는 사람의 힘듦을 뒤늦게 눈치채는 날의 무너지는 마음일 테지만. 그냥 나는 입을 닫기로 했다.


    대신에 나는 언젠가 남편 안에 켜켜이 쌓여 있을 먼지들을 털어낼 너른 들판을 보여주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건물들로 가려진 뿌연 하늘이 아니라, 가슴이 쩡해지도록 파아란 하늘이 땅 이쪽과 저쪽에 닿아 있는 곧은 지평선을 보여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한참을 달리다 돌에 걸려 뒹굴더라도 아프지 않을 말랑한 땅을 보여주겠다고 속으로 곱씹으며 다짐했다.











매거진_소박한 결혼산문

2018.05.05.~

@john.and.molly

Photo. ⓒImre Tömösvári, unspl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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