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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Jul 15. 2019

생활을 살고 싶은 게 아니라 인생을 살고 싶은 거니까


결혼, 인생






    새벽 두 시였지만 가로등 덕에 그렇게 어둡진 않았다. 짧은 꼬리를 그리며 하늘로 솟는 불꽃들은 문득문득 떠오르던 서늘한 마음을 잠재우기 충분했다. 그래도 허리가 베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깊이 잠든 남편 옆에서 선잠을 잤다 깼다를 반복했다. 텐트를 뚫고 들리는 파도 소리는 때로는 자장가로, 때로는 소음으로 들렸다. 앞으로 세 시간 후면 해가 뜰 거야. 나는 흐리던 하늘이 밤사이에 개길 바라며 지루한 밤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소원은 텐트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와 함께 씻겨 내려갔다. 구름이 걷히기는커녕 금방 그칠 것 같지 않은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곤히 잠든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여보, 비 와. 가자.


    날씨를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떠난 탓에 우리의 바닷가 캠핑은 물거품이 됐다. 아니지, 처음부터 캠핑은 계획에도 없었다. 저녁밥을 먹다가 바다 보러 갈래?, 라는 한 마디에 집을 나섰고, 마침 차 트렁크에 들어있던 원터치 그늘막을 펼쳐냈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모래사장 위에서 하루 자고 가자 싶었을 뿐이었다.


    결 달리는 차 안에서, 그것도 구름 속에서 뜨는 해 맞이했다. 그래도 좋았다. 그러니까, 남편과 함께 살기 시작한 후로 나의 삶일종커다란 여행이 된 것과, 한마디 말에 훌쩍 떠나 줄 수 있는 남편이 좋았다.






    결혼을 하고 나서 우리 주말부부로 산다 하더라도, 나는 결코 퇴사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는 나의 일을 사랑했고, 꽤 잘했으며, 큰 자부심도 가지고 있었다. 남편 역시 맞벌이는 당연한 일이라 여겼고, 일을 하는 내 모습을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혼하기 몇 전, 나는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리고 퇴직을 기점으로 꽤 오랫동안 여러 가지 금단현상─우울, 열등감, 무기력─에 휘둘려야 했다. 일 중독이었으니까.


    하지만 인간의 능력 때문인지, 인간의 간사함 때문인지, 나는 주어진 생활에 조금씩 적응해 나갔고, 야망, 꿈, 목표 같은 말들보다는 안정, 평화, 보장된 미래 같은 말들 마음을 두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변화된 가치는 고스란히 남편에게도 전달되었다. 여보, 안정적인 연금을 받아야 해. 여보, 우리 적금 얼마나 모였을까? 여보, 아무리 힘들어도 버텨야 하는 거 알지? 힘내요, 내가 내조 잘할 게.


    한동안 나의 부담스러운 말들을 묵묵히 들어주던 남편은 우리 연애시절을 추억하던 어느 날, 드디어 속마음을 꺼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우리 꿈은?"






    꿈. 결혼하기 전, 우리는 서로의 꿈을 열렬히 응원했었다. 남편은 나의 직업적 성취를, 나는 남편의 새로운 공부와 도전을 말이다. 하지만 나의 꿈이 좌절되면서 남편의 꿈도 조금씩 잠식되기 시작했다. 내가 외치기 시작한 안정적인 삶을 위해, 가정의 평화와 보장된 미래를 위해. 나는 그를 자연스럽게 을 포기하는 길로 인도고 있었던 것이다.


    아, 그 꿈. 또 우리는 연애 시절 여행을 떠나는 걸 자주 상상했었다. 그 시절, 오래도록 멀리 떠나는 여행은 상상만으로도 우리를 흥분시키는 일이었다. 그래서 자주, 언젠가 둘 다 일을 때려치워버리고 훌쩍 세계여행을 떠나자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나서 차가 생기고 살림이 늘었다. 앞으로 더 잘 살기 위해선 더 많이 모아야 했다. 멀고 긴 여행을 위해서 포기해야 할 게 많아져 버렸고, 두려워졌다. 안정과 평화뒤로하고 우리가 정말 떠날 수 있을까, 자신감이 없진 것이다.


    하지만 자신감이 사라진 건 내 쪽만이었다. 남편 속에는 여전히 여행이라는 꿈이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었고, 그 꿈의 짝꿍은 여전히 나였다. 나는 우리의 꿈 얘기를 꺼내는 남편의 말에 조금 당황했지만, 곧 마음속이 꿀렁이는 것 같은 기분에 빠져들어다. 안정, 보장 같은 말들이 순식간에 마음 저 구석으로 밀려, 낯선 생각들이 올라왔다.


     나는 어른이 되는 것과 꿈을 포기하는 것이 같다고 오해하게 됐을까. 그러면서도 여행의 품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숨 가쁘도록 부러워했을까. 안정적인 삶이란 도대체 뭘까. 이런저런 낯선 생각에 속이 메슥메슥하다가도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남편 모습에 안도감을 느끼는 건 또 무엇인가.


    그런 낯선 생각들 끝에. 결국 나는 계여행이라는 우리 앞에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갑작스러운 밤바다 여행을 떠나거나, 찬 강물에 뛰어들어 수영을 하거나, 볕이 좋은 잔디에 아무런 깔개 없이 벌러덩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남편에게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남편에게도 다른 나라 여행을 사랑하고, 샹송에 맞춰 춤추기를 좋아하고, 똑같은 영화를 지겹도록 다시 보는 나에게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을 걸 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알아가고 적응해나가면서 똑같은 결론에 닿게 다. 우리에겐 안정적인 생활보다는 즐거운 인생이 더 잘 어울린다는 . 아니, 즐거운 인생을 사는 일이 우리에겐 안정적인 생활 자체라는 것. 


    이것은 다분히 우리 부부의 얘기다. 세상에는 다양한 색깔의 꿈들이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 어떤 꿈이라도 그것을 포기하는 것과 어른이 된다는 것이 같은 선 위에 있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












매거진_소박한 결혼산문

2018.05.05.~

@john.and.mo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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