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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Jun 06. 2019

남편옷 내옷, 내옷 내옷


결혼, 섞임






    부스스 일어나 눈을 뜨니, 오전 10시였다. 밤 사이 열어둔 창문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 들고 있었고, 침대는 여전히 뽀송뽀송했다. 푹 잘 잤고, 개운다. 게다가 오늘은 휴일. 하루 종일 남편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기분이 좋았다. 아니, 기분이 좋았다.


    막 잠에서 깨어난 감각들이 점점 또렷해짐과 동시에 귓가에 들리는 소리도 또렷해졌다. 퍽퍽, 퍽퍽. 띠리리이 띠리. 우와왕, 우와와왕. 피융. 헛, 헛. 엎드려 누워있던 몸을 일으키니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남편의 등이 보였다. 뭐야, 일어나자마자 게임해?


    그랬다. 남편은 내가 일어나기 한참 전에 홀로 일어나 조용히 모니터를 켜고, 닌텐도를 연결하고, 젤다를 켰다. 패드를 꼭 쥔 손을 날렵하게 움직이며, 은밀하고 조용하게, 게임을 하기 시작했을 거다.


    어, 어? 여보? 벌써 일어났어? 그의 말에 아쉬움이 가득이다. 그러면서 열심히 이것저것을 침대에 가져다 주기 시작했다. 녹차 아이스크림 꺼내 줄까? 어, 흘렸네? 물티슈 가져올게요. 과일 먹을래? 아이고, 생강이 똥 쌌다. 얼른 치우고 올게. 여보, 추워? 창문 닫아줄까? 부탁하지도 않은 일들을 분주하게 해 준다. 아, 물론 남편은 틈틈이 링크(게임 <젤다>의 캐릭터)가 되어 절벽도 오르고, 강물도 건너고, 괴물들과도 싸웠다.


    남편 옆에 누워 모닝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남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여보, 지금 게임 계속하고 싶어서 심부름 다 해주는 거지? 남편은 들켰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아니야~ 사랑해서 그러는 거지~, 한다. 그래, 오늘은 쉬는 날이니까 마음껏 게임해도 좋아. 결혼 전에는 게임하는 사람들 이해를 못했는데, 이젠 이해 하다마다. 지금 하고있는 게임이 남편의 직장 스트레스를 날려주었으면, 하는 바람까지 가지게 되었다.






    멀리 나갈 때는 그래도 나름 예쁘게 차려 입어 보려고 하지만, 집 앞에 산책을 가거나 시장에 갈 때는 편하게 옷을 입고 나간다. 그리고 그 편한 옷은 통이 넓어 할랑할랑하고 엉덩이를 덮어 마음에 안정을 주며 색깔까지 마음에 드는 티셔츠들이다.


    며칠 전, 퇴근한 남편과 마트에 가기로 했다. 나는 얼른 남편의 회색 티를 홀랑 입고 거실에 앉아 남편을 기다렸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남편이, 여보, 내 회색깔 티 못 봤어?, 하고 찾는다. 나는 씨익 웃으며 남편 앞에 서면, 남편은 내 옷!을 외치며 절망한다. 남편옷 내옷, 내옷 내옷이다.


    남편의 억울함이 논리적이지만 웃기다. 자기 옷은 다 내가 입을 수 있는 것들인데, 내 옷은 자기가 입지 못한다고 투정을 부리는 모습에 미안해지지만. 돌려주기에는 이 옷, 너무나도 편안하다. 나는, 그럼 여보도 내 원피스 입어!, 하고 현관문을 향해 달려 버렸다.






    식성도 섞이고 있다. 나에게 최고의 간식은 언제나 과일이었다. 한여름에 단물을 흘리며 먹는 복숭아와 한겨울 까먹는 귤. 아침 대용으로는 바나나가 최고였고, 딸기는 초봄부터 늦봄까지 나의 헛헛함을 채워주는 최고의 간식이었다. 음, 고기는 별로.


    하지만 남편의 최고의 간식은 고기였다. 최고의 반찬도 고기, 최고의 야식도 고기, 최고의 주식마저도 고기였다. 타고난 성실함으로 남편은 직접 치킨을 튀겼고, 수육을 만들었고, 육전을 부쳤다. 그때마다 나는 남편 옆에서 이거 몽땅 직접 치울 거라는 약속을 받아내고 섰었다.


    우여곡절 끝에 남편이 만들어온 음식은 바라만 보아도 부담스러웠다. 안 그래도 기름기가 많은 고기를 기름에 튀기거나, 볶거나 한 음식이 부담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고생해서 만들어 온 음식을 안 먹을 수도 없어서, 새초롬하게 젓가락을 들고 한 입 입에 넣었다. 맛이 있든 없든, 무조건 감탄해줘야지, 마음을 먹으며.


    하지만, 맛있다. 바사삭, 노릇한 껍데기를 뚫고 나온 육즙이 맛있고,  잘 익은 고기가 쫀득하다. 달달하고 짭짤한 소스가 혀를 감는다. 남편표 치킨도, 수육도, 육전도 모두가 내 입맛에 맞았다. 어? 여보! 맛있어요! 연기가 아니라 진심이다. 남편의 어깨가 올라간다.


    물론 남편도 결혼 전보다 많은 양의 과일과 야채를 먹기 시작했다. 우리의 식성도 섞이고 있었다.






    여자와 남자라는 성별의 차이도 있고, 살아온 배경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생긴 것도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살면서 구분 지어져 있던 경계들이 허물어지는 걸 느낀다. 그러면서 평생 동안 알지 못했던 나의 새로운 모습을 마주하기도 하는데, 그것도 참 신기하다. 또 당연히 그러려니 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는 일도, 약간 충격적이지만, 재밌다.


    같이 살면 닮는다는데, 이 말이 로맨틱한 사랑에만 바탕을 둔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살을 비비살면서 서로를 배워가고, 싸우고 풀고를 반복하며 맞춰가는 거였다. 결혼은 현실이지. 이런 현실이라면 로맨틱하기만 한 영화 속 세상보다 낫겠다, 싶다.



    이 글을 쓰다가 말고 잠깐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니, 내 얼굴에 남편 얼굴이 있다. 같이 사는 거, 참 유쾌한 일이다.











매거진_소박한 결혼산문

2018.05.05.~

@john.and.molly

Photo. ⓒCrew,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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