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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Aug 22. 2019

아빠 같은 남자를 만나고 싶었어요


결혼, 관계






    이십 년이 훨씬 지난 이야기다. 밖에서 놀기엔 너무 덥던 날, 골목 담벼락이 내준 손바닥만 한 그늘에 일곱 살 여자 아이 둘이 쭈그리고 앉아 할 수 있는 모든 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나뭇가지를 집어 들어 개미 앞길을 막기도 하고, 시멘트 바닥에 모난 돌멩이를 긁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러다 지루해지면 주머니에 넣어 놨던 뽑기 장난감을 갖고 놀았고, 문방구에서 산 스티커 인형을 꺼내 옷을 갈아입히기도 했다.


    더 이상 생각해 낼 놀이가 없어 지루해지던 참에 한 아이가 자기 집에 가서 시원한 물을 마시자고 했다. 그래, 가자. 아이 집은 골목 바로 앞에 있는 반지하 빌라였다.


    서늘한 집엔 아무도 없었다. 물을 마신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자그마한 방은 커다란 이층 침대로 꽉 차있었다. 그 집에 사는 아이는 친구에게 자기는 매일 밤 이층에서 잠을 잔다고, 그게 얼마나 멋진 일인 줄 아냐고 으스대며 자랑했다. 그래, 일곱 살 인생에서 이층 침대는 자랑할 만한 일이었고, 부러울 만한 일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침대가 없었다. 나 한 번만 올라가 봐도 돼? 딱 한 번 만이다? 응! 딱 한 번! 친구는 후들후들 떨리는 작은 발과 작은 손으로 키보다 훨씬 높은 사다리를 천천히 올라갔다.


    우와, 높다! 천장을 손으로 더듬으며 친구는 신기해했다. 두 아이는 이층 침대 위에서 인형 놀이를 했다. 공주와 왕자 놀이에 취해 오후 늦게까지 그 위에서 놀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고, 방 안은 점점 어두워졌다. 아이는 잽싸게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형광등을 켰다. 그리고 아직 이층에 있는 친구를 올려다보며, 이제 집에 가라 했다. 오후 다섯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친구는 집에 갈 수 없었다. 올라갈 땐 몰랐지만, 내려가기에 이층 침대는 너무 높았던 것이다. 친구는 한쪽 다리를 사다리 위에 두려고 몇번을 시도했지만 헛발질을 할 뿐, 결국 내려오지 못했다. 무섭다며 울상이 된 친구를 위해 아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두 아이 모두 일곱 살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나고, 아이의 아빠가 집에 돌아오셨다. 아이는 아빠에게 자초지종을 재잘거렸다. 아이의 아빠는 방으로 들어가 침대 이층에 꼼짝없이 갇힌 친구에게 걱정 말고 아저씨 손을 잡으라고 말씀하셨고, 구를 번쩍 들어 땅에 내려주셨다. 친구는 그로 인해 구원을 받았다.


    자기 집으로 돌아온 친구는 자기 아빠가 아닌 다른 남자가 멋있어 보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음을 깨달았다. 물론 그 깨달음은 다음 날이면 홀라당 다 까먹을 거였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 시절 그 나이 아이들이 다분히 그랬듯, 그 아이에게도 최고의 남자는 아빠 혹은 친구네 아빠였을 거다.






    실은 친구 집 이층 침대에 올라갔다가 내려오지 못했던 그 겁쟁이 여자 아이가 나다. 그때 공중에 휘둘렀던 헛발짓의 느낌이 여전히 싸하게 느껴지고, 또 그런 나를 구원해 준 친구 아버지의 늠름함도 당시보다 지금이 더 생생하다.


    이런 어렸을 적 기억 때문만은 당연히 아니겠지만, 중학교에 가고 점점 이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서 나는 자주 아빠 같은 사람을 이상형으로 꼽았다. 위기에 처했을 때 짠 하고 나타나 나를 구해주고, 돌봐줄 수 있는 남자. 넓은 가슴으로 용납해주며 모든 걸 다 해주는 남자. 물론 '이상'형 얘기다.


    이상과 달리 연애는 현실이고, 결혼은 사실이었다. 적어도 아빠(혹은 상상 속의 큰오빠) 같은 남자는 진짜 아빠 말고는 존재하지 않음을 미리 알았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이기심이었음도 알았어야 했다.






    남편을 만나기 전에 몇 번 연애를 했었상대 대부분은 연하남이었다. 그들은 나의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성격에 끌려 연애를 시작했을 테지만, 사실 나는 연애에서만큼은 보호를 받고, 무조건적인 이해를 받고, 상대의 어깨에 기대어 쉴 수 있었으면 했다. 그렇게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달랐다. 당연히 관계는 어그러졌고, 헤어졌다.


    그렇게 몇 번 연애를 실패하다 보니 차라리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사람을 만나 보자 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그러다 남편과 닿았고, 나는 그의 착한 성품과 넓은 이해심, 배려심에 빠져들었다. 꼭 아빠 같은 남자였다. 보다 한 살 어린.


    하지만 결혼을 하고 같이 살면서 아빠는 아빠뿐이구나, 남편은 결코 아빠일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남편이 나보다 연하이거나, 그가 돌연 변했기 때문 아니다. 히려 그런 생각은 스로 억지를 부리고 있는 상황에서 찾아온다. 그러니까 편이 나의 투정을 말없이 받아주몽땅 다 이해해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걸 발견했을 때 말이다. 


    그래도 요즘은 남편이 아빠와 똑같길 바란다면 그건 분명 아내의 이기심 거야, 하는 반성도 할 만큼 좀 컸. 그러면서 깨달은 또 한 가지는,  역시 그의 엄마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가진 너그러운 마음과 한없는 기다림, 조건 없이 사랑을 베푸는 일은 아내와 남편 사이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게 우리의 결론이다. 우리는 서로의 부모도, 서로의 아들과 딸도 될 수 없고, 되려 해서도 안됨을. 결국 한쪽의 일방적인 헌신으로 이어가는 관계는 보이지 않는 병을 키우는 일임을 배워가고 있다. 제법 치열하게 말이다.






    사랑해서 결혼했고, 지금도 많이 사랑하고 있다. 으로도 우리는 열심히 사랑하며 살 거다. 자 대 남자로, 어른 대 어른으로, 인격 대 인격으로. 그 사랑 속에 우리는 여전히  편이고, 서로의 지지자이자 조언자, 가장 소중한 사람일 거다. 그리고 결국 서로에게 종속되지만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부부로. 서로를 존중하지만 서로를 과잉보호하지 않는 부부 아름답고 단단하게 살아갈 거다.











매거진_소박한 결혼산문

2018.05.05.~

@john.and.molly

Photo. ⓒSebastián León Prado,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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