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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Mar 20. 2019

오롯이, 여행


결혼, 여행





    그냥 여행이 아니었다. 무려 신혼여행이었다. 그 각별한 여행, 그 아름다운 부다페스트에서 우리가 그렇게 격정적으로 싸우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우리는 우리의 신혼여행을 에메랄드 빛 바다와 프라이빗 풀을 가진 고급스러운 빌라가 아닌 에어비엔비로 찾은 작은 집에서 보내기로 했다. 케리어 대신 배낭을 메자. 저녁은 장을 봐서 직접 해 먹고, 그 남은 음식을 아침으로 먹자. 그래도 점심은 근사한 데서 사 먹자, 약속했다. 또 발이 닿는 데로 걷고, 길을 잃더라도 이왕이면 좁은 골목길로 걷자고도 약속했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시간을 느리게 흘려보내자, 느리게 흐르는 그 시간의 속도를 섬세하게 느껴보자, 약속했다. 그래도 충분히 낭만적일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신혼여행이었으니까.


    하지만 얼마나 지났을까, 배낭을 멘 여행자의 마음속에 조그마한 욕심이 비집고 들어왔다. 빼꼼히 고개를 들이민 그 욕심은 여기까지 왔는데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먹어야 하지 않겠냐며 우리를 유혹했고, 우리 앞에 조바심을 툭- 하고 던져 놓았다. 우리는 슬그머니 그것을 주워 주머니에 넣은 채로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더 많은 곳을 걷고, 더 많은 것을 보아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조바심에 이끌려 찾아간 곳이 부다페스트에 있는 세체니 온천이었다. 비엔나로 넘어가는 기차는 오후 4시 40분에 있고, 부지런히 달려가도 세체니 온천에 오후 1시 반쯤 도착할 것 같았으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겨우 세 시간. 이 세 시간 안에 우리는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하고, 온천을 즐기고, 다시 나와 옷을 갈아입고, 늦은 점심을 먹은 후, 부다페스트 중앙역으로 가야 했다. 분명 강행군이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챙겨 온 수영복을 입어보고 싶었고, 부다페스트까지 갔는데 세체니 온천 안 가봤냐는 말은 듣기 싫었다. 꼭 거기에 다녀오면 우리의 여행이 더 풍성해질 것 같았고, 조바심이 났다.

 

    결국 우리는 몇 번의 환승 끝에 세체니 온천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 날은 하필 일요일이었다. 빈 캐비닛을 찾는 것부터 시작해서 옷을 갈아입고, 사람들 틈에 비집고 들어가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오니 부다페스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곳에 온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물 보다 사람이 많았다. 아아, 여유롭고 우아한 온천욕은 물 건너갔구나. 우리는 겨우 찾아낸 빈 공간에 걸터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양인이라고는 우리 둘 밖에 없다. 생전 처음 입어보는 비키니 수영복은 그 끈이 풀릴까, 하는 걱정으로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여기저기 물속에서 술을 마시겠다는 아저씨들과 그 아저씨들을 향해 호루라기를 삑삑 불어대는 안전요원들의 실랑이가 펼쳐졌다. 좁은 틈을 향해 높은 곳에서 다이빙을 하는 젊은이들과 그들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를 지르는 또 다른 젊은이들은 분명 친구들은 아니었을 터였다. 맞다. 그곳은 아수라장이었다.


    온천 한 귀퉁이에서 겨우 몸을 담근 나는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버렸다. 물로 담요를 삼아 내 몸을 가리고, 강렬하게 내리쬐는 빛에 눈을 감고 차라리 안 보련다, 하고 있었다. 그래도 남편은 여기까지 왔으니, 사우나도 해보고 둘러도 보자며 나를 이끌었다. 하지만 물 밖으로 나오니 속옷만 걸치고 길을 걷는 듯한 허전함과 부끄러움이 올라왔고, 얼른 이 곳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속에선 부끄러움과 도망가고 싶은 욕구가 더욱 진하게 피어올랐지만, 표정만은 최대한 편안하게 지으며 도망치듯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계단식 사우나가 있었다. 우리의 것과 비슷해서 반가운 마음에 유리문을 활짝 열었지만, 역시나. 그곳에도 사람들이 빼곡히 앉아 있었다. 한 노부부가 길을 터줘서 우리는 제일 꼭대기 계단에 앉을 수 있었지만 너무 좁았다. 그렇게 오 분이나 지났을까? 우리는 안 되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고만 싶었다. 하지만 나가는 것은 들어와 앉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게임이었다. 계단은 습기로 미끄러웠고, 수증기는 시야를 가렸으며, 사람들은 오밀조밀 붙어 앉아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게다가 모두들 앞을 향해 앉아 있었기에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며 나갈 길을 얻어야 했다.


    그렇게 겨우 거의 다 내려왔을 때, 남편은 마지막 관문인 앞줄에 앉아 있는 노부부에게 나갈 수 있도록 길을 터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때, 꽈당. 남편은 미끄러운 바닥에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말았다. 사우나 안에 모든 사람들은 남편과 나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의 차분함마저 그때 같이 넘어져 버린 것 같았다.


    우리는 도망치듯 아수라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서둘러 씻고 정리해서 늦어도 3시 30분까지, 다시 이 곳에서 만나자 약속을 하고 각자 샤워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슬프게도 샤워실 안은 만원이었고, 그 바람에 나는 약속시간보다 10분 늦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샤워실에서 방황을 하던 그 시간, 남편은 약속 장소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가엾은 아내가 밖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 나를 찾아 밖으로 나와 버렸다. 유심은 나의 폰에만 꽂혀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남자 샤워실도 사람이 많은가 보다, 생각하며 그 자리에서 망부석이 되어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초조하게 흘러갔다. 백인들만 왔다 갔다 할 뿐, 나의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남편이 헉헉대며 내가 있는 곳으로 뛰어 돌아왔다. 한 번 나가면 다시 들어갈 수 없는 출구에서 직원에게 사정사정해 겨우 들어온 남편이었다.






    나는 왜 화가 나버린 걸까? 늦은 건 난데.


    왜 여기서 기다리지 않았느냐고, 나는 나의 남자를 향해 날카로운 말을 쏘았다. 남편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외면하고 홱 돌아 출구로 향했다.


    우리는 서로 꽤 멀리 떨어져 길을 걸었다. 둘 다 단단히 화가 나버렸다. 그래도, 화가 났어도, 늦어도 4시 반까지는 역에 도착해야 했다. 저기 오는 버스를 놓치면 끝이다. 저 버스를 무슨 일이 있어도 타야 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그 버스를 못 탔다. 결국 터져버린 것이다. 내 여권 내놔!, 라는 말과 함께.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삐질삐질 땀이 나는 것 같다. 왜 우리는 그렇게 예민했고, 그렇게 싸워댔을까. 그 각별한 신혼여행, 그 아름다운 부다페스트에서!


    어떻게 풀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아마 단기 기억 상실증이 아닐까) 결국 우리는 다음 버스를 무사히 탔고, 겨우 시간을 맞춰 부다페스트 중앙역에 도착했다. 다행히 기차는 연착되었고, 우리는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비엔나로 넘어갈 수 있었다.


    만약에, 영화 <인터스텔라>처럼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에게 찾아가 메시지를 전달해 줄 수 있다면, 무슨 말을 남길까?, 생각해 보았다. 너, 비키니 입지 마. 남편이 넘어질 거야, 꼭 잡아줘. 세체니 온천은 그 날 물 반 사람 반일 테니 사람 구경하려면 가고 아니면 가지 마. 아니다, 그냥 가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세시 반까지 약속 장소로 가. 하지만 너무 서두를 필요 없어. 기차 연착되거든. 이런 말들을 할까?


    내년에 남편과 함께 떠날 여행 루트를 정하면서, 남편에게 다시 부다페스트에 갈 거냐고 물었다. 남편의 대답은 응, 가자, 였다. 나는 속으로 <인터스텔라>처럼, 다른 차원의 내가, 아니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말을 걸 수는 없지만,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말을 걸 수는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과거의 나는 어떤 말을 할까. 아마 일 년 뒤 부다페스트에 있을 나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싶다.


내년에 다시 우리의 신혼여행지를 찾게 된다면,
그때에는 너무 예민해지지 말고,
욕심부리지 말고.
그냥 너의 시간을, 너의 여행을,
너의 남자를 더 많이 사랑해 줘야 해! 쫌!



    이 말을 전해주고 싶은 건, 행복한 여행과 불행한 여행의 가름은 얼마나 많은 곳을 갔고, 얼마나 많은 것을 먹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사랑했느냐에 달렸다는 기특한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다.






    여행은 여행 자체로 오롯하다. 조바심을 내부지런히 걸었든지, 느긋하게 게으름을 피웠든지. 거대한 에펠탑 앞에 섰든지, 낮은 울타리 옆을 지나든지. 세계 3대 진미를 먹든지, 길에서 핫도그를 사 먹든지. 그리고, 세체니 온천이 텅텅 비어 있어서 여유로운 온천욕을 즐겼든지, 그렇지 못했든지. 여행길 위에 마주한 것들이라면 그것은 오롯이 여행이다. 우리는 또다시 어리석은 선택들을 할 것이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감정을 소모할지도 모른다. 완벽하게 행복한 여행을 꿈꿔지만, 약간은 불행한 여행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오롯이 여행이다. 단지 우리는 사랑하는 것에 서툴렀을 뿐이었다.


    그래서, 내년에 세체니 온천 또 갈래?라고 물으신다면, 음...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












매거진_박한 결혼산문

2018.05.05.~

@john.and.mo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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