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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Jun 28. 2019

결혼서약


결혼, 약속






    하루에 물 한 잔을 마실까 말까다. 커피는 두 잔도 세 잔도 마실 수 있는데, 물은 작은 생수 한 병도 버겁다. 맹물을 잘 마셔야 건강하다는 말에 억지로라도 물을 마실라치면 숨이 막히는 것 같아 괴롭다. 그렇게 나도 남편도 물 마시기를 잘 못하니, 우리 집에는 정수기가 없고 대신 조금씩 생수를 사다 마신다. 하지만 그렇게 물 마시기를 싫어해도 꼭 생수가 바닥난 날이면 괜히 목이 마르고 초조해진다.


    생수만 떨어져도 그런데, 동생사는 동네에서  수돗물이 나온 지벌써 꽤 다고 하니 그 마음이 오죽할까. 빨래를 하고 얼굴을 씻고 또 먹고 마셔야 할 수돗물이 붉게 나오는 건 짜증스럽고 우울한 일일 것 같아 나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위로한답시고 많이 우울하지, 하고 운을 뗐다. 동생은 폭삭 가라앉은 목소리로 우울한 정도가 아니라 마음이 서늘해지고 무섭기까지 하다고 했다. 아마 '물'이어서 그럴 거다.


    물은 생활의 기본이니까. 틀면 나오는 깨끗한 물은 너무나도 당연해서, 물의 오염은 저만치 떨어진 관념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거의 대부분이다. 마치 아프리카의 식수난이라던가, 아니면 가난한 나라의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오염수 같은. 아니면 가까운 데에서 그런 썩은 물이 나더라도 우리의 기술은 그것을 금방 맑은 물로 돌려놓고야 말 것이라는 믿음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순수한 믿음은 마땅하고 당연한 것의 배신으로 큰 상처를 입는다. 동생이 몇 주째 나오는 적수를 바라보며 무섭기까지 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거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가장 믿을 만한 것이어야 한다. 자연으로 치면 물이고, 집으로 치면 기초공사고, 사람으로 치면 가족이다. 지나가던 아저씨에게 들은 쌍욕은 에잇, 재수 없어!, 해버리면 끝이지만, 남편이나 아내에게 들은 작은 비하는 오래도록 남아 마음을 썩힌다.






    결혼 전부터 봐왔던 웹툰이 있다. 웹툰 작가는 남잔데 어쩜 그렇게 여자의 심리를 잘 표현하는지, 늘 감탄하며 봐왔었다. 바로 지난 화는 오랫동안 잘 지냈던 주인공의 남자 친구가 자기보다 훨씬 어린 여자에게 잠깐 흔들렸다는 걸 알게 되고, 고민 끝에 헤어지기를 결심한다는 내용이었다. 화가 나면서도 눈감아 줄까 싶고, 손을 잡은 것도 아닌데 내가 너무 예민한가 싶다가도 스스로를 비참게 여기던 주인공의 마음에 너무 집중했는지, 나는 덜컥 남편에게 이렇게 물어버렸다.


여보, 만약에 내가 다른 남자한테
아주 잠깐이라도 마음이 흔들렸다면,
어떻게 할 거야?


    뜬금없는 질문에 남편은 잠깐 생각을 하더니, 우리가 연애하는 게 아니라 부부로 사는 건데, 나는 쉽게 헤어지지 못할 것 같아, 했다. 여기서 잠깐 감동했지만, 그래도 나는 남편과 달리 용서하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남편은 그냥 마음만 잠깐 흔들린 거라도? 따로 만난 적도 없고, 연락을 한 적도 없어도?, 라며 토를 달았지만, 나는 야박함을 굽히지 않았다. 물론 그 야박함은 나에게도 적용되는 것이지만.


    내가 그렇게 말한 건 내 속이 좁은 탓도 있었으나, 그것보다는 약속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을 증인으로 삼아 평생 서로만을 사랑하며 살아가기로 한 약속, 결혼서약 말이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두 사람이 만나 결혼을 하는 건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중 면 의리로 산다, 정으로 산다 하지만, 겉모양이 변했을 뿐이지 그것들이 사랑이 아닌 건 아니다. 오래도록 서로의 곁에서 서로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게 전우애나 우정 때문일 리만은 없다.


    어쨌든 그렇게 아름답게 시작한 사랑의 서약에는 낭만적인 면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를 고약하게 괴롭히는 책임이라는 면 있다. 안에는 경제적인 것, 성적인 것, 자녀에 대한 것 등 많은 것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책임은 서로가 서로만을 일한 사랑의 대상으로 두는 것이 않을까. 


    이렇게 결혼서약은 책임을 끌어들이지만, 책임을 기본으로 삼지는 않는다. 약속의 기본은 믿음이다. 마치 수도꼭지를 돌리면 언제라도 투명한 물이 쏟아질 것을 믿는 것처럼, 약속으로 이어진 부부는 서로를 믿는다.






    이 얘기를 하니 남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결혼은 약속이야. 신뢰를 기본으로 한 약속.


    남편은 내 말을 곱씹어 생각해 보는 듯했다가, 갑자기 자기는 절대 바람피우지 않겠다고, 나에게도 절대 바람피우지 말라고 다. 나는 그 말이 조금 우스우면서도 생경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인데, 이 당연함이 무너져 내리는 걸 너무 자주 봐와서 그런 것 같았다.

 

    같이 사는 날들이 길어지면서 서로 향한 설렘이나 애정 어린 호기심은 조금씩 사라질 거 그 사실이 조금은 슬프고 씁쓸하기도 하겠지만, 그렇다고 사랑이 식었다고 단정 짓지는 않을 거다. 랑은 그것이 가진 속성들─설렘과 호기심, 같이 있고 싶은 마음, 보고 싶은 마음, 닿고 싶은 마음 등과 함께 이해, 희생, 포기하지 않음, 배려, 끝까지 믿어주는 마음, 기다림 등균형을 이루며 존중받을 때 비소로 아름다워진다. 현실 생각은 안 하고 365일 설레기만 하는 것도, 이해는 해주지 않으면서 포기만은 결코 하지 않는 것도 결코 완전한 사랑일 수 없다는 걸 우리는 안다.






    결국, 부부는 결혼식장에서 시작되지 않고, 아이의 탄생 앞에서도 만들어지지 않는 것 같다. 부부는 혼인신고를 하는 시청에서도, 첫날밤을 지낸 그 아름다운 호텔에서도 시작되지 않는다. 부부는 약속 앞에서 시작된다. 서로를 위해 모든 책임을 기꺼이 지겠다는 약속과 언제나 함께 하겠다는 약속. 그러니까 당신만을 사랑하겠다는 약속 앞에서 비로소 부부가 된다. 그리고 부부는 그 약속을 서로 믿을 때 완전해진다.


    결혼식이 많은 돈을 들여 화려하거나 사람들의 질투를 얻을 만큼 아름답지 않아도, 두 사람의 진실한 약속이 있다면 그 어디나 가장 아름다운 예식장이 될 거다. 그런 결혼식이라면 매년, 아니 매 달이나 매일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여보. 우리 결혼식 한 번 더 할까?











매거진_소박한 결혼산문

2018.05.05.~

@john.and.molly

Photo. Eric Alves,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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