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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Aug 03. 2019

그 평범한 날, 나의 결혼식


결혼, 신부

 






   새벽 다섯 시 반, 알람 소리에 간신히 눈을 세수를 하고 거울을 봤다. 지난밤 화장 잘 받으라고 특별히 준비하셨다던 회 한 접시 덕인지, 아니면 그걸 준비하신 엄마의 사랑 덕분인지 피부가 좋아 보였다. 화장실을 나오니 엄마가 벼르고 서 계셨다. 스킨이든 에센스든 아무것도 바르지 말고 오라는 메이크업샵의 당부가 있었대도 막무가내로 내 볼에 무언가를 발라주는 엄마의 손길도 사랑이었겠지, 싶다. 엄마, 이거 너무 기름져. 괜찮아, 비싼 거야.


    갑자기 애잔하게 나를 바라보시는 엄마를 뒤로하고, 나는 헐렁한 남방을 입고 딸기잼 샌드위치와 단호박 우유, 옷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여섯 시까지 집 앞으로 언니가 오기로 했다. 아직 십 분이나 남았지만, 집더 있다간 괜히 울 것 같아 서둘러 나왔다.






    청담의 메이크업샵. 이른 시간인데도 샵 안에는 꽤 많은 신부들이 단장을 하고 있었고, 신랑들은 로비에 앉아 하품을 하거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나의' 신랑에게 괜히 일찍 와서 지루하게 기다릴 필요 없다고, 그러니 여덟 시 반까지 오라고 말길 잘했다 생각하며 거울 앞에 앉았다. 머리부터 한다 했다.


    헤어 담당 원장님은 나의 단발머리를 최대한 끌어 모아 밑으로 묶었고, 잔머리가 삐져나오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스프레이를 뿌리고 빗질을 했다. 스프레이와 빗질 사이사이에 어떠세요? 괜찮으세요?,라고 자주 물어보셨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괜찮든 그렇지 않든 미용실에서 나는 솔직한 대답을 한 적이 없으니까.


    그다음엔 탈의실로 가서 드레스를 입으라 했다. 나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민소매 실크 드레스를 골라 뒀다. 사실 샵들어서는 순간,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긴 머리를 예쁘게 세팅하고 있는 신부들에게 조금 기가 눌려있던 참이었다. 언니는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얼른 들어오라고, 시간 없다고 채근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옆에서 도와주는 이모님을 따로 섭외하지 않았다. 이모님 섭외 비용만 몇 십만 원이었다.


    언니와 나는 좁은 탈의실에서 드레스 끈을 묶느라 낑낑댔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다른 신부의 이모님이 나서서 도와주셨다. 이모님은 아유 예쁘다, 너무 예쁘다, 를 연발하시며 끈을 가차 없이 조이셨는데, 아마 살짝 주눅이 든 나에게 내린 처방일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자리를 옮겨 메이크업을 받았다. 화사한 조명과 커다란 거울, 그 앞에 조개처럼 입을 벌린 수많은 화장품들은 나의 정신을 빼앗았고, 나는 황홀했다. 곧 시원한 솜으로 내 얼굴을 닦으며 왜 이렇게 기름진 크림을 바르고 왔느냐는 직원의 핀잔 섞인 소리에 멋쩍게 웃었다. 그다음은 기억이 잘 안 난다. 눈 감고 있으라고 해서 그런 것 같다.


    평소에 화장을 하지 않는 에게 손톱으로 긁으면 깊이 패일 것 같은 두꺼운 화장이 불편했지만, 확실히 예뻐져 있어서 만족했다. 곧 '나의' 신랑이 내 뒤에 나타났다. 언제 왔는지도 못 봤는데 이미 헤어와 메이크업을 어느정도  상태였다. 신랑은 꿀이 떨어질 것 같은 눈으로 거울에 비친 나를 바라보았다. 내 눈에도 꿀이 떨어졌다. 남자도 화장을 하니 저렇게 예뻐지는구나.


    뒤에서 나의 변신을 지켜보던 언니는 뭔가 좀 심심하고 너무 심플하다고 하더니, 어디선가 진주 머리띠를 가지고 와서 희한한 방법으로 내 머리 뒤에 꽂아 주었다. 신랑도, 원장님도, 직원들도 모두가 바로 감탄을 했지만, 나는 한참 에 거울로 뒷모습을 비춰 본 뒤에야 홀로 감탄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가 끝났다. 나와 신랑은 무거운 드레스와 불편한 정장을 입고 언니 차 뒷자리에 꼿꼿하게 앉아서 서울을 빠져나갔다. 머리가 망가지니 어디에 기댈 수도, 화장이 지워지니 가려운 눈을 긁을 수도 없었지만 견딜만했다. 우리는 차 안에서 딸기잼 샌드위치를 조금 먹었다.


    결혼식을 하기로 한 교회에 도착하고 나니 그제야 실감이 다. 식까지 한 시간 남아 있었다. 우리는 몇 장의  어색한 사진을 찍은 후 나는 신부 대기실에 앉아 그리로 들어오는 하객들 맞았고, 신랑은 아마도 입구에 서서 하객을 맞고 있을 거였다. 마음 같아선 나도 바깥에서 함께 인사하고 싶었다. 왔어? 고마워! 응, 저리로 가면 돼. 식권 챙겼어? 이렇게 말하면서.


    십 분 전이되니 신부 대기실로 신랑과 진행자가 들어왔다. 이모님 대신 언니가 드레스 아래로 손을 어넣어 치맛자락을 손 들려줬는데, 한 손으로 치마와 부케를 함께 들려니 너무 불편했다. 언니는 걸을 때 발로 치마를 퉁퉁 차면서 걸으라 했다. 안 그래도 구두도, 부케도 불편한데, 괜히 넘어질 것 같은 나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꼭 잡은 신랑 손이 나를 지탱해 줄 거라는 사실이 듬직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예배당 입구에 나란히 섰다. 아빠가 계셨더라면 신랑 입장과 신부 입장을 당연히 따로 했을 테지만. 아니, 원한다면 아빠가 안 계시더라도 각자 입장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혼자 버진로드를 걷는 건 상상만으로도 떨렸고, 슬펐다. 아빠 생각이 났다.






    열두 시가 되자 사회자는 하객들에게 정숙을 요했고, 사회자는 곧 신랑 신부 입장! 을 외쳤다. 누군가가 우리의 등을 살짝 앞으로 밀어줬다. 그와 동시에 찬송가가 울려 퍼졌다. 나는 부케를 놓칠까 봐, 치마를 발로 밟을까 봐, 그래서 넘어질까 봐 노심초사하며 천천히 걸어갔다. 신랑은 내 속도에 맞췄다. 사실 우리는 네댓 번 입장과 행진을 연습했었다. 나름 이미지 트레이닝(?)도 많이 했었고. 무튼 무탈하게 버진로드를 걸었다.


    주례는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주례 목사님과 눈을 마주치는 건 너무 어색해서 시선을 아래에 둘 수밖에 없었다. 나는 뒤를 돌아 예배당을 둘러보고 싶은 어이없는 욕구가 올라오는 걸 스스로도 어이없어하며 주례 말씀을 들었다. 주례가 끝나고 서로를 바라보며 결혼 서약서를 읽을 때 너무 떨려서 한 번 버벅거렸지만 신랑은 잘 읽었다.


    서약이 끝나고 혼이 선포됐다. 이제 우리는 부부다. 우리가 부부가 된 걸 축복하기 위해 내가 가르치던 아이들과 친구들이 축가를 불러줬고,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며 고마워했다. 엄마에게, 시부모님에게, 하객들에게 인사를 드렸다. 인사할 때 가슴골이 보이지 않도록 꼭 한 손으로 가리라던 언니의 말이 떠올라서 다행이었다. 아, 엄마는 인사할 때 신랑만 안아주고 나는 안 안아주셨다. 그래서 사람들이 웃었는데, 나는 그게 엄마의 실수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엄마가 나를 안아주셨다면, 아마 나와 엄마는 화장 번지도록 펑펑 울었을 거다.


    이제 마지막, 행진이 남았다. 우리는 조금 긴장이 풀린 상태로 손을 잡고 섰다. 모든 하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카메라를 꺼내거나, 박수를 치기 위해 손을 비우며 우리를 맞을 준비를 했다. 그리고 우리는 고마운 하객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추며 그 사이를 걸었다. 이번엔 조금 빨리 걸어서 음악이 끝나기 훨씬 전 버진로드 끝에 도착해버렸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고, 축하를 받고, 하객들과 악수를 했다. 스러워서 뽀뽀를 하는 사진은 기어코 생략해 버렸다.






    주례자, 직계가족, 친척들, 친구들, 동료들과 차례로 사진을 찍고 또다시 신랑과 사진을 찍고 나서야 예배당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우리는 신부대기실로 가서 꽉 쪼이던 드레스 끈을 풀고, 불편한 구두를 벗어던졌다. 남편은 정장 그대로, 나는 원피스로 갈아 입고 또다시 하객을 맞으러 피로연장으로 가야 했다. 그런데 갈아입을 원피스가 보이지 않아 삼십 분을 찾아 헤매야 했다. 차라리 나에겐 잘 된 일이었다. 좀 쉬고 싶었으니까.


    형부의 도움으로 옷을 잘 갈아입고, 피로연장으로 가서 하객들과 인사했다. 고맙고 고마웠다. 그때가 두 시쯤이었나. 두 시 반쯤이었나.


    하객들이 많이들 빠져나간 뒤 우리도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배가 고팠지만 음식이 잘 넘어가지는 않았다. 남편은 맛있게 밥을 먹었다. 식사를 하던 도중에 가족들에게 호출을 받고 식권을 정산하기 위한 고급스럽고 비밀스러운 방으로 들어갔다. 부부가 됐지만 정산은 철저히 따로였다. 우리는 각각 다른 테이블 위에서 각자의 가족들과 함께 식권의 수와 실제 입장 인원, 축의금 액과 방명록을 정리했다.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리고 다시 교회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고, 도와준 이들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우리는 도망치듯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호텔방에서 피곤에 절어 잠깐 잠들었다가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고기, 고기, 고기 생각이 절실해서 소고기 무한리필점에 가서 실컷 먹겠노라 다짐했다.


    밥을 먹다가 문득 우리가 지금 결혼식을 마친 건지, 아니면 아직 하지 않은 건지 헷갈렸다. 앞에 앉은 남자가 남자 친군지 남편인지는 실감의 문제였다. 맞다. 실감이 날 리가 없었다. 갑자기 어색해졌지만 입에 들어가는 소고기는 달았고, 배가 터지도록 계속 먹었다. 결혼식 전이든 후든, 남자 친구든 남편이든, 지금 중요한 건 이제 당분간 다이어트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 생각하며. 밥을 먹고 나서 바로 맞이할 첫 부부싸움은 예상하지 못한 채 말이다.












매거진_소박한 결혼산문

2018.05.05.~

@john.and.mo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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