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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Jun 04. 2019

어떻게 그 사람이 결혼 상대인 줄 알았어요?


결혼, 확신






    약속 시간은 저녁 여덟 시였다. 밥 한번 먹자는 가벼운 인사가 구체적인 약속으로 이어지기까지 열흘. 나는 그 열흘 동안 만날까, 말까, 만날까, 말까. 정말 많이 고민했었다. 어색할 것 같았다. 그와 나 사이에는 4년이라는 긴 공백이 있었고, 그 시간을 뛰어넘어 그와 마주 보고 앉아 있기에는 나름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는 동시에 그의 4년 전 모습이 그리웠고, 그가 보냈을 시간들이 궁금했고, 또 그가 어떻게 변했는지 가까이서 보고 싶은 욕심 생다.


    그렇게 만나고 싶은 마음과 만나기 싫은 마음이 속에서 투닥거렸지만, 결국 약속을 잡고 말았다.






    나는 스물다섯, 그는 스물넷이었다. 나는 그의 순수함이 좋았고, 그는 나의 당돌함을 좋아했다. 나는 그의 가지런한 치아가 좋았고, 그는 동그란 나의 눈을 좋아했다. 나는 그의 기타 소리가 좋았고, 그는 나의 손짓을 좋아했다. 우리는 각자가 가지지 못한 것을 조용히 사랑하며, 그렇게 가까워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것들은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니까, 그의 가지런한 치아나 기타를 연주하는 손가락이 없어진다 해도. 조금씩 나이가 들어 그의 순수함에 때가 묻는다 해도. 그의 자랑거리가 사라져 초라해지고, 가여워지면 가여워질수록, 나는 그를 더욱 사랑하리라 다짐했다.


     어느 늦은 봄날에, 같이 걷다가 마주한 커다란 벚나무 앞에서 그가 멈춰 섰다. 그는 나에게 나무 앞에 서 보라 했다. 흩날리는 벚꽃잎이 아깝다며, 오늘 햇빛이 정말 예쁘다며, 마침 분홍색 원피스를 입지 않았냐며, 그는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말했다. 나는 연한 분홍빛이 물든 그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의 빛이 나에게도 물을 들였다. 나는 다소곳하게 나무 앞에 섰, 부끄러워했다.


   그렇게 사진 한 장을 찍고 다시 길을 걸었다. 가끔씩 닿는 어깨와 손등에도 우리는 손을 잡지 않았다. 우리는 사귀지 않았다. 나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고, 그는 임관과 동시에 먼 곳으로 떠나야 했다. 사람들도 우리는 어울리지 않는다 했다. 아니, 그것들은 핑계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관계를 무엇으로 정해버리기 무서워했는지도 모른다. 출발에는 도착이, 삶에는 죽음이 필연적이듯, 시작에도 끝이 따를 것 같아서. 그래서 비겁해지기로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가 먼 곳으로 간 뒤, 나는 떨어진 꽃을 누르고 말려 몇 송이의 압화를 그에게 보냈고, 그는 나에게 <비포선셋>이라는 영화를 보냈다. 우리는 그것들 서로의 마지막 선물이 될 줄 알지 못했고, 벚나무 앞에서 어색하게 찍은 사진 그가 찍은 나의 마지막 사진이 될 줄 몰랐다. 사귄 적이 없으니 헤어졌다고도 말할 수 없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멀어졌고, 각자의 삶을 살다가 지치고, 또 각자의 연애 시작하고 끝을 냈다.






    우리는 송도역 근처에서 보기로 했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나는 역 근처에 있는 카페들을 기웃거렸는데, 분위기 좋은 곳이나 사람이 적은 곳을 찾으려는 것은 아니고 카페의 영업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여덟 시 약속이니, 아홉 시쯤 문을 닫는 카페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으로.


    그렇게 혼자 컴컴한 동네 골목을 다니다가, 밤 9시에 문을 닫는다는 카페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이리로 오면 돼, 그에게 문자를 보냈고, 뭐라고 인사를 하면 좋을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를 수십 번 떠올렸다.


    여덟 시가 되자 작은 카페 안 문달린 작은 종소리로 가득 찼고, 공기 무거워졌다. 결국, 그가 들어왔다. 잘 지냈어? 네, 잘 지냈어요. 몸이 많이 좋아졌다. 뭐, 군인이니까요. 누나는 변한 게 없네요. 아, 그래?


    나는 그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봤다. 변한 게 없는 건 내가 아니라 그였다. 가지런한 치아, 투박한 손, 듣기 좋은 목소리, 쌍꺼풀 없는 맑은 눈, 짧은 머리, 하얀 피부와 말투. 우리는 서로의 4년을 어떻게 보냈는지를 이야기했지만, 서로의 모습이 너무나도 그대로라서 마치 우리 사이에 나흘만 있 것처럼 느다. 걱정과는 다르게 시간이 빨리 흘렀다.


    아홉 시가 되자 우리는 밖으로 나와 걷기 시작했다. 걷다가 벤치가 보이면 앉고, 그러다 추워지면 다시 걸었다. 나는 스물다섯, 그는 스물넷 같았다.


    지만 는 스물아홉, 그는 스물여덟이었고, 두 달이 지나면 나는 서른이었다. 출발에는 도착이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처럼 시작에는 끝이 따르리라는 사실이 더욱 선명해질 나이. 사랑에도 관계에도 책임이 짙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나의 고민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어렸던 그때, 그 늦은 봄날에, 내 손을 잡지 않은 것 후회할 뿐이라고 했다. 이번에는 손등이 스치지 않았다. 어깨도 닿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내 손을 잡았다. 추운 공기에도 잡은 손 사이에 땀이 맺힐 정도로 오랫동안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6년 전에 우리가 사귀었다면 이렇게 부부가 됐을까? 아닐걸. 그땐 너무 어렸어. 아마 싸우다 싸우다 지쳐서 결국 헤어졌을 거야. 우리는 나란히 침대에 누워 스물다섯, 스물넷의 우리를 생각했다. 이제 나는 서른하나, 그는 서른이다.


    오랜 시간이 걸려도, 멀리 떨어져 있어도, 결국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는 걸까. 운명이라는 말에 갇히긴 싫지만, 내 옆에 누워있는 남자를 보니 어쩌면 사랑에 만큼은 운명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든다.


    그래, 4년 만에 우리가 다시 만나고, 그날 그가 내 손을 잡은 건, 분명 운명이었다. 복종함으로 받는 운명 말고, 스스로 선택함으로 얻어내는 운명. 그것은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용기를 내어 걸어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일지도 모겠다.


    한 번쯤은 해봤고, 한 번쯤은 받아봤을 질문일 거다. 어떻게 그 사람이 결혼 상대인 줄 알았어요? 음... 4년 만에 다시 만난 날, 그 남자가 제 손을 잡았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냥 결정했어요. 종소리도 들리지 않았고요, 하늘이 정해준 사람이라는 확신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주어지지 않았어요. 게다가 누군가의 보장으로 만난 사람이라면, 모든 책임을 누군가에게 돌려버리게 되잖아요. 그저 운명 앞에 머리 숙이거나, 찍 소리 하지 않고 따르는 복종이나, 아니면 다른 사람을 보증 삼아 하는 결정은 못하겠더라고요. 스스로 책임을 지더라도, 우리가 결정하자 했어요. 만약 하늘이 정해준 사람이 눈 앞에 나타났다 하더라도, 저는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을 거예요.











매거진_소박한 결혼산문

2018.05.05.~

@john.and.molly

Photo. ⓒTravis Yewell,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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