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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Jul 01. 2019

여기서 프러포즈하시면 안 됩니다

결혼, 청혼


결혼, 청혼






    고등학교 3학년 때, 여학생들에게 유독 인기가 많았던 두 선생님이 계셨다. 이십 대 후반의 남자 영어 선생님과 수학 선생님. 선생님들은 여고생들의 인기가 부담스러우셨는지, 수업을 하다 말고 틈틈이 자신들의 여자 친구 얘기를 자주 하셨었다. 그리고 우리는 두 분의 연애 이야기를 들으며 아, 세상에는 두 부류의 남자가 있구나, 하고 새삼스럽게 놀라곤 했는데, 그만큼 두 선생님의 연애 완전 달랐다. 다른 연애 스타일만큼 두 분의 프러포즈도 완전히 달랐다.


    영어 선생님은 사실 프러포즈란 게 따로 없었다. 결혼 후 작은 아파트 하나를 분양받아 침대나 냉장고 같은 것 없이 무작정 신혼을 시작했다 하셨다. 선생님은 늘, 아직 날이 추워서 냉장 음식을 베란다에 내놓으면 상하지 않는다, 얇은 이불 하나를 깔고 자는 건 허리에 좋지 않다, 나는 장인어른이 너무너무 무서워서 피해 다닌다, 등의 발언으로 여고생들의 결혼 환상을 깨뜨리셨고, 예상대로 우리는 경악했다. 선생님은 그런 반응을 은근히 즐기시는 것 같았다.


     그에 비해 수학 선생님의 프러포즈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경악이었다. 꼭 영화에서나 봤음직한 이벤트와 퍼포먼스가 가득했으니까. 선생님은 2층짜리 카페 건물을 통째로 빌렸고, 2층을 풍선과 꽃, 촛불, 음악으로, 1층은 맥주와 치킨과 친구들로 꽉꽉 채웠다고 하셨다. 그리고 2층에서 일어나는 모든 프러포즈의 진행과정을 1층 친구들에게 생방송으로 전달했다고 하셨다. 선생님의 표현대로 2은 로맨틱의 끝이었고 1층은 환호의 끝이었다 했는데, 우리는 그 얘기를 들으며 세상에 이런 프러포즈도 있구나, 싶어 놀라워했었다.






    요즘에는 남자가 프러포즈하는 게 당연시되지 않고, 여자가 먼저 하는 경우나 프러포즈를 하지 않는 경우도 다는 얘길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남자 친구에게 프러포즈를 받고 싶은 마음을 감추지는 못했었다. 슬슬 결혼 얘기가 나오기 시작한 후부터 나는 남자 친구에게 프러포즈 언제 할 거야? 하긴 할 거야?, 를 자주 물었고, 데이트 도중 조금이라도 차분한 분위기가 돌면 혹시 지금 하려나?, 하며 김칫국부터 마시곤 했다.


    그렇다고 수학 선생님처럼 화려한 프러포즈를 받고 싶었던 건 아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우니까 아무도 우리를 신경 안 쓰는 공원 벤치나 조용한 카페 구석자리였음 좋겠고, 풍선이나 꽃이나 촛불 대신 진중한 말 한마디에 작고 반짝이는 것 하나만 있으면 좋겠다고 상상해왔다. 솔직히 말하면, 영어 선생님처럼 어영부영 결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결혼 준비가 끝나고 나서도 남자 친구는 프러포즈를 하지 않았다. 지금 와서 하는 프러포즈는 '결혼을 승낙받기 위함'이 아니라 '나와 결혼을 해줘서 고맙다'는 정도의 뜻이 담긴 행사가 될 게 뻔 김이 샜고 서운했지만, 그렇다고 남자 친구에게 투정을 부릴 수도 없었다. 그렇게 결혼식은 삼 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인천에 그는 춘천에 있어야 할 게 당연한 그 밤에, 남자 친구의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나 배터리 1퍼센트밖에 없다! 자기야, 한 시간 있다가 공원으로 나와요. 어? 끊긴다. 공원 입구에 있ㅇ, 뚝.


    촉이 왔다. 이번에는 진짜다. 프러포즈였다. 다급한 그의 목소리에 덩달아 다급해진 나는 시간 생각은 안 하고 청바지에 머리를 질끈 묶고, 엄마! 나 프러포즈받고 올게! 외치며 공원으로 뛰쳐 나갔다. 5월의 저녁 날씨는 참 좋았다. 공원에는 운동하는 사람들과 아이들과 놀러 나온 사람들, 강아지들, 장기를 두는 할아버지들로 가득했다. 나는 그 사람들 틈에 서서 나타날 남자 친구를 기다렸다. 설렜고, 들떴고, 행복했다.


    그런데 그때, 한 남자의 분노 섞인 고함이 울렸고 순간 공원은 조용해졌다. 뭐, 새끼야? 이런 개새끼가! 찰싹. 검정색 나시티만 입은 덩치 좋은 아저씨는 자기보다 스무 살은 더 어려 보이는 호리호리한 남학생의 뺨을 사정없이 내려치기 시작했다. 학생은 맞으면서도 바들바들 떨며 서있었고, 그 옆에 아주머니는 학생을 대신해서 두 손바닥을 싹싹 비비고 있었다. 아저씨는 분이 안 풀렸는지 때릴 것(?)을 이리저리 찾다가 다시 맨손으로 학생을 후려쳤다. 아악! 학생은 아주머니의 비명을 신호 삼아 전력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저씨에게 자비는 없었다. 학생에 버금가는 속력으로 그의 뒤를 쫓았다.


    머리가 하얘졌다. 주변이 웅성웅성했다. 나는 얼른 경찰에 전화를 했다. 여기 역 근처 공원인데요, 어떤 아저씨가 남학생을 때렸고, 지금 남학생이 도망갔는데요. 아저씨가 그 뒤를 계속 쫓아다녀요. 잡히면 크게 다칠 것 같아요. 네, 거기요. 네, 네. 얼른 와 주세요, 제발요. 경찰은 10분 정도 뒤 공원에 도착했지만, 이미 두 사람은 사라진 였고, 눈물로 빌던 아주머니는 경찰 앞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뗐다. 아마 세 사람은 가족이었던 것 같다.






    삼십 분쯤 지나니, 공원은 다시 평화로워졌다. 나는 허루한 마음에 다리가 휘청거리는 것 같아 구석에 있는 벤치에 앉았고, 하염없이 남자 친구를 기다렸다. 전화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또다시 삼십 분이 지나고, 드디어 나타난 남자 친구 온몸이 땀에 젖어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있었던 일을 얼른 다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는 10분만 기다려 달라고 하더니 풀숲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래, 이왕 기다린 거 10분쯤이야. 나는 멍하니 시선을 흐리게 두고 그가 다시 나를 부를 때까지 기다렸다. 프러포즈고 뭐고 그냥 집에만 들어가고 싶었다.






    여전히 땀에 젖은 얼굴로 다시 나타난 남자 친구는 드디어 내 손을 잡고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그의 손에 이끌려 풀 숲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의 기척이 없는 공터에 촛불이 예쁘게 켜져 있었고, 장미꽃 한 다발이 놓여 있었다. 그는 커다란 배낭을 뒤적뒤적하더니 반지를 꺼냈고, 결혼해줘서 고맙다고, 우리 잘 살자고 하며 내 손에 끼워주었다. 그리곤 나를 꼬옥 안았다.


    고맙고, 사랑스럽고,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그 소동을 옆에서 다 지켜본 터라 기운 다 빠져 있었다. 나는 그의 품에 잠시 안겨있다가 쏙 빠져나와 촛불을 껐다. 자기야, 그런데 여기서 초 키다가 경찰이 와서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된다고 하면 어떡해. 우리 얼른 정리하자. 남자 친구는 쪼그려 앉아 초를 끄는 나를 당황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맞다. 당황했을 거다. 아니 황당했을 거다.


    어쨌든 우리는 주섬주섬 초를 정리하고 근처 치킨집으로 갔다. 콜라를 시원하게 들이켜는 남자 친구에게 공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했고, 나도 그의 말을 들었다. 그는 춘천에서 퇴근을 하자마자 바로 종로에 들려 미리 주문해 둔 반지를 찾고, 다시 꽃과 초를 사기 위해 쉴 새 없이 동네를 뛰어다니며 프러포즈를 준비했다니, 나의 이런 반응에 서운한 것도 당연했다. 우리는 서로 오해 아닌 오해를 풀며 신나게 치킨을 뜯었다.


    그렇게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손에 낀 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여기저기 분주하게 뛰어다녔을 남자 친구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도 나고 미안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고마웠다. 그러다가도 공원에서 겪은 일이 떠올라 몸서리가 쳐졌다.






    누군가가 프러포즈가 어땠냐고 물어보면 나는 그냥 동네 공원에서 꽃과 반지만 있는 소소하고 예쁜 프러포즈였다고 말한다. 그러면 남편은 옆에서 듣다가 아니지, 자기가 내가 준비한 촛불을 다 꺼버렸잖아, 한다. 그러면 나도 지지 않고 아니지, 그때 경찰 신고하는 것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그랬잖아, 한다. 그렇게 몇 번의 '아니지'를 거쳐 우리의 프러포즈를 말하면, 듣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곤 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의 표정을 보며 은근히 흐뭇해했다. 우리만큼 할 말이 많은 프러포즈는 흔하지 않을 거야, 하는 은근한 자부심이 있어 그렇다. 한 가지 남편에게 미안한 건, 내가 해 줄 생각은 안 하고 받으려고만 했던 마음이다. 언젠가 나도, 나랑 결혼해줘서 고맙다는 깜짝 이벤트를 준비해야지 싶고, 그날에는 별 탈 없이 순조로웠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을 가질 뿐이다.











매거진_소박한 결혼산문

2018.05.05.~

@john.and.molly

Photo. ⓒAnnie Spratt,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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