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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Aug 06. 2019

제가 결혼은 처음이라서요


결혼, 신랑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대충 샤워를 하고, 많은 짐을 챙기고, 부모님께 따가 멋지게 뵙자는 쿨한 인사를 남긴 채 집을 나섰다. 쿨하지 않으면 괜히 찡해질 것 같다.


    강남으로 가는 광역버스 배차간격이 길어 한번 놓치면 난감해질 게 뻔다. 나는 잰걸음으로 정류장으로 향했다. 초조한 내 마음과는 달리 토요일 아침의 정류장은 한산하고 평화로웠다. 아직 버스가 오려면 좀 남았으니 한 숨 돌리자, 하며 의자에 앉아 두 다리를 뻗었다. 그렇게 십 분쯤 지나 나타난 버스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버스는 나를 스치고 지나버렸다. 왜 하필 그날, 버스 기사 아저씨는 나를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가 버렸던 걸까!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냥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수밖에.






    다음 버스를 타고 강남역에서 내려 다시 택시를 타고 여자 친구가 알려준 메이크업샵에 도착했다. 어색하게 문을 열고 샵으로 들어가니, 낯선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조명, 거울, 진한 화장품 냄새, 분주한 직원들, 과한 친절. 무엇보다 낯설었던 건 턱시도를 입고 다닥다닥 붙어 앉 꽤 많은 펭귄 같은 남자들의 모습이었다. 그래, 5월 5일 토요일은 결혼하기 좋은 날짜지. 시답잖은 생각을 하다가 순간 그들 앞에서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뭐, 상관없었다. 신부의 이름을 묻는 직원에게 이름을 대니 잠시 기다려달라고 했다.


    직원이 앉으라는 자리에 앉자마자 머리 세팅이 시작됐다. 직원은 나의 짧은 군인 머리를 힘껏 끌어올려 왁스를 바르고 스프레이를 뿌렸다. 스프레이 한 통을 다 쓸 것 같았다. 머리 모양이 웨딩 촬영 때보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분주한 직원들을 보며 불만은 그냥 속으로 삼키기로 했다. 다른 직원이 다가와 메이크업을 해야 한다며 안으로 들어가랬다. 나는 착한 양이 되어 직원의 인도를 따랐다.


    안으로 들어가니 여자 친구가 하얀 드레스를 입고 앉아 있었다. 예뻤다. 드레스도, 베일도, 머리에 달린 구슬들도 그녀와 잘 어울렀다. 하지만 멀리서 나를 부르는 소리에 그녀에게 눈을 떼고 자리에 앉아야만 했다. 나중에 메이크업을 다 받고 나서야 그녀 뒤에 서서 거울로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예쁘다고, 화장 잘 됐다고 얘기해주고 싶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메이크업 역시 어색했다. 무언가를 바르고 바르고 또 발랐다. 눈을 크게 해 드릴까요?, 라는 직원에 말에 자존심이 상해서 그냥 자연스럽게 해 주세요,라고 말했다. 물론 나중에 후회했지만. 어쨌든 화장을 끝내고 보니 여자들이 왜 화장을 하는지 이해가 됐다. 여자 친구는 여전히 메이크업 중이었다. 나보다 두 시간이나 빨리 왔을 텐데 대단하다, 생각하며 정장으로 갈아입으러 갔다. 탈의실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이 꽤 멋졌다. 자신감이 솟았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 역시 한 마리의 펭귄이 되어 로비에 앉아 기다리는데, 저기서 드레스 치맛자락을 한껏 위로 치켜든 여자 친구가 어정쩡한 자세로 걸어 나왔다. 나는 얼른 그녀 뒤에 서서 끌리는 치맛자락을 함께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예비 처형의 차에 탔고, 그 안에서 여자 친구가 싸 온 단호박 우유와 빵을 맛있게 먹었다.






    결혼식이 있을 교회에 도착하자마자 몇 장의 사진을 찍은 후 신부는 바로 신부대기실에 들어갔고, 나는 예배당 입구 앞에 섰다. 식 삼십 분 전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하객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누구랑 인사를 나누었는지, 어떤 말을 했는지, 정말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 이건 기억난다. 이 결혼식의 주인공이 정말 나란 말인가, 정말 내가 결혼을 한단 말인가, 하는 생각들. 어안이 벙벙했던 것. 하나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쯤 지나니 진행자가 내게 다가와 신부대기실로 가자했다. 꽃과 하얀 커튼으로 장식된 방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여자 친구, 아니 나의 신부의 모습이 마냥 예뻤다. 어느새 우린 손을 잡고 버진로드 앞에 서있었다.






    신부의 손을 잡고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히 걸어 나가면서도, 몸은 그렇게 하고 있으면서도, 내 속은 여전히 내가 신랑인가, 나 하객 아닌가, 나 지금 뭐 하고 있지, 하는 어이없는 생각이 맴돌았다.


    그러다 주례단 앞에 섰을 때에야 약간 정신이 들었고, 주례 말씀이 어렴풋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어이없는 생각. 지금 내 정장 바지가 엉덩이에 끼진 않았는지, 반듯하게 서 있는 건지, 다리를 너무 딱 붙이도 선 건 아닌지, 하는 가벼운 걱정들이 몰려왔다. 두 손으로 바지를 털며 옷을 정리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 답답했다. 주례가 끝나고, 서약을 읽고, 성혼이 선포된 후에야 불편한 차렷 자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결혼 서약을 읽을 때만큼은 정말 진지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다짐하며, 곱씹으며 천천히 읽었고, 그 서약의 뭉클함을 축가를 들으며 터뜨렸다. 눈물을 흘렸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양가 부모님께 인사를 드릴 땐 뭔가 복잡 미묘했다. 죄송하고, 고맙고, 낯설기도 하고. 묘한 책임감 같은 것도 들었다.


    전에 친구 결혼식 갔을 때 친구 녀석이 양가 부모님과 하객분들께 인사를 드리는 시간에 어리바리하며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때 결혼식 사회자가 이런 농담을 했었다. "OOO군이 결혼은 처음이라서 익숙지 않은가 봅니다. 원근 각처에서 오신 하객 여러분께 인사드릴 때 축하와 격려의 박수로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수롭지 않게 흘려 들었던 사회자의 멘트가 또렷이 기억이 났다.


    실감은 마지막 순서인 신랑 신부 행진 때 조금 들었다. 그땐 처음 입장할 때보다 긴장이 풀렸고, 하객들과 눈을 맞춰 인사를 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걸을 수 있었다. 그렇게 긴장이 풀렸어도 카메라는 익숙하지 않았다. 나는 웨딩 촬영 때와 똑같이 복사 붙여넣기 표정을 카메라 앞에서 지어 보여야 했다. 얼굴 근육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사진 촬영 후 우리는 신부대기실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나는 신부가 옷을 갈아입을 때까지 잠깐 멍 때리며 앉아 쉬었다. 곧 하얗던 신부는 남색 원피스와 함께 한결 편안해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바로 피로연장으로 향했다. 배가 고팠고 뷔페 음식이 맛있어 보였지만, 테이블을 하나하나 돌며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는 게 먼저라고 누군가 말했다. 멀리서 와주신 부모님 지인들과 친척들, 나의 친구들과 아내의 친구들, 빠짐없이 인사를 드리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사실 나는 그리 힘들진 않았는데, 아내는 많이 힘들어 보였다.


    휴, 드디어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아 밥을 먹었다. 한참을 먹다 보니 또다시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는 신랑인가, 하객인가. 이것은 나의 결혼식인가, 다른 이의 결혼식인가. 그때 형의 호출로 밥 먹다 말고 식비를 정산하러 갔는데, 아 이거 내 결혼식 맞구나, 다시 정신이 들었다.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의 모든 일정이 정말 다 끝이 났다. 우리는 후다닥 짐을 챙겨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갔다가 저녁 먹으러 다시 나왔다.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은 아내가 웬일로 소고기 무한리필점에 가자는 반가운 얘기를 했다.


    두꺼운 화장을 지운 원래의 민낯과 편안한 청바지가 더 잘 어울리는 여자 친구, 아니 나의 아내가 내 앞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이제 이 여자와 평생을 함께 사는 거구나, 싶어서. 우리 정말 잘 살 수 있을까, 막연한 걱정이 들어서. 그건 양가 부모님께 인사를 드릴 때 느낀 책임감과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에잇, 지금은 그냥 즐겁게 고기나 먹자. 나는 묘한 기분을 털어버리고 데이트를 할 때처럼 즐거워지려고 노력했다.











매거진_소박한 결혼산문

2018.05.05.~

@john.and.mo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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