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바람, 과호흡이 시작되다
너 남자친구,
다른 여자랑 걸어가더라.
누군가 내게 이런 말을 건넨다면, 지금의 나는 가슴이 쿵 하고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숨조차 쉬지 못해 과호흡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거의 나는 달랐다. 조금은 무디지만, 그래서 의도치 않게 더 강인했달까.
‘다른 여자? 친누나일걸?’ 이 말은 나도 누군가를 온전히 믿었던 사람이었음을 증명한다. 그 당시에는 내게 의심이라는 존재가 없었거나, 아주 작은 세포에 불과했나 보다. 친구의 말 한마디보다는 내 연애 상대와의 감정을 믿었고, 아무런 의심이 돋지 않았던 내 이상한 촉을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보란 듯이 깨졌고, 깨진 틈 사이로 의심이 스멀스멀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가 돌연 자신의 바람을 당당히 자백했던 것이다. 그의 뻔뻔함에 생전 처음으로 눈앞이 하얘진다는 경험을 했다. 싸구려 커플링을 하수구에 집어던지고, 발길이 닿는 대로 터덜터덜 걸었다. 눈치 없이 장미가 한가득 만발한 날이었다. 그것이 그의 첫 바람이었다.
우리 동네에는 아파트 단지 사이를 연결하는 ‘장미터널’이 있었다. 터널에는 나무로 된 벤치가 두 개 있는데 그와 나는 종종 벤치에 앉아 장난을 치며 편의점 간식거리를 먹거나, 대화를 나눴다. 그곳은 ‘거기로 와 ‘하면 자연히 연상케 되는 암묵적인 약속 장소이자, 추억이 깃든 공간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우리의 장미터널’에서 그는 이별과 동시에 바람을 고백했다. 갑작스레 마주한 현실을 감당하기 벅찬데, 과거의 추억들마저도 모조리 거짓이 된 것 같았다.
그는 스킨십이 문제라고 했다. 나만 안 울었으면 바람 폈을 일은 없었다고, 그래서 자기는 전 여자친구에게 돌아간 거라고. 물론 그럴듯하게 말하던 그의 대답에서 두 여자를 ‘동시에’ 만난 이유는 찾지 못했다. 그냥, 멍해졌다. 그제야 그가 만들었던 ‘첫사랑의 틀’에서 나온 것 같았다. ‘이런 게 사랑이다, 사랑이면 모두 이렇게 (깊은 스킨십을) 한다’라던 쓸모없는 말과 틀. 나는 그것이 사랑을 빙자한 욕구였음을 아주 늦게 깨달았다. 사랑의 가면 뒤 일그러진 민낯을 알게 된 것처럼 찝찝했다. 그에게 받았던 일상 속 숱한 사랑들, 이를테면 학원 앞에 늘 데리러 온다거나, 간식을 건네주거나, 나를 보고 귀엽다며 배시시 웃던 순간들까지 한순간에 치가 떨리게 싫어졌다.
걸음이 닿는 대로 걷다가, 한참을 주저앉아 울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주변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처음 겪은 안압에 눈이 너무도 아팠다. 바람피운 그여도 좋으니 누군가 나를 도와주길 바랐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저 골목에 숨어들어 겨우 호흡하는 나뿐이었다. 17살, 내 인생 첫 과호흡이었다.
지금 내가 겪는 트라우마의 시작점은 이때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사람이 그토록 무력해질 수 있음을 느꼈던 지옥 같은 하루. 그때는 몰랐다. 그 하루가 10년 동안 내 발목을 잡을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