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리버 Nov 17. 2024

악몽 그리고 사라지는 기억들

두 번째 바람, 불안장애가 시작되다



10년 동안 켜켜이 쌓아온 상처를 어떻게 해야 배출해 낼 수 있을까. 이 책을 완성하며 글로써 배설하면 의심과 상처에서 자유해질 수 있을까.



제주의 삶에 적응해 나가는 중이다. 크게 달라진 건 없다. 남양주에 있던 내가 제주의 어느 한적한 시골에 왔을 뿐. 2층 침대가 있는 작은 스텝방에서 3명의 스텝과 함께 지내는 재미를 느끼며, 자연스레 대학시절의 기숙사 생활을 떠올리곤 했다.


이곳, 게스트하우스 생활은 연애할 때의 내 모습과는 다른 나를 마주하게 했다. 나의 존재를 ’필요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달까. 나보다 5살에서 8살 남짓 어린 스텝들의 끼니를 챙겨주면 ‘언니 진짜 대단하다’며 부끄러운 칭찬을 해주고, 청소를 마치면 사장님과 매니저님으로부터 ‘손 델 것 없어서 좋다’는 피드백을 받는다. 칭찬에 한껏 활력을 얻다가 별안간 서울에서의 내가 자존감이 꽤나 낮은 삶을 살았음을 확신했다. 그동안 어떠한 인정과 칭찬을 갈구했던가,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함으로써 내가 쓸모 있어지는 그런 삶을 바랐던가, 하는 생각들이 스쳤다. 타인의 인정 없인 활력도 없는 무력한 삶이 내 것이었다는 게 문득 싫어졌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조식 제공과 숙소 청소, 이불 빨래, 배딩, 체크인, 영화 상영, 메뉴 주문 등의 일을 모두 마치면 밤이 된다. 중간중간 쉬는 시간도 있지만, 아침 8시부터 조식 준비로 하루를 시작해 밤 11시에 끝나는 일은 어느 정도의 체력을 필요로 했다. 하루를 마친 후에는 ‘타지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면 응당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괜스레 쓸쓸하게 밤 산책을 하곤 했다. 주변이 하도 어두워 가로등이 있는 길을 오가는 것뿐이었지만 하늘에는 별이 참 많았다. 목을 뒤로 넘겨 하늘을 올려다보며 멍을 때리곤 했다. 그리고 나서야 스텝방에 돌아와, 짧게라도 여행의 목적이었던 ‘의심’에 관한 글을 쓰고는 까무룩 잠에 들었다.






제주에서의 첫 악몽이었다. 6년 만났던 남자친구는 내 꿈의 단골손님이다. 그는 1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꿈에 등장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곤 한다. 내가 조금이라도 과거를 잊고 행복해지려 하면 언제나 꿈속에 찾아와 내 머리가 깨질 듯이 무언가를 외친다. 하지만 그 말은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도통 들리지 않고, 머리가 깨질듯한 답답함만 남긴 상태로 끝이 난다. 보통 그런 날에는 가위까지 동시에 눌려, 아침에 일어나면 팔 하나 들어 올릴 힘조차 없어진다. 그뿐인가, 밤 사이에 그 시절 두려움에 떨던 고등학생이 된 나는 숨을 잔뜩 몰아쉬며 꿈에서 깨야 했다. 애써 힘을 주었던 탓인지 아침에 일어나면 미간에도 고통의 흔적이 남아있곤 했다. 그의 외침은 무엇일까. 그것이 사과라면 듣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를 온전히 용서해야만 이 꿈이 끝이 날까. 서른한 살의 나는 그와의 기억 앞에선 여전히 순수하고 무력한 고등학생이 되었다.


이토록 그를 원망하는 ‘짓’은 억울하게도 그가 아닌 나 자신을 망치고 있었다. 자학이었다. 부정적인 감정을 내게 끊임없이 주입했고, 무의식까지도 미움의 감정에 절여졌다. 의식적으로 생각을 전환하려 해도, 부정의 기운은 쉬이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에 남아 꿈으로 나타났다. 그도 그럴 것이 여행 내내 그를 떠올리며 글을 쓰고 있으니 악몽이 찾아올 수밖에.


고난 없이 성공한 이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오히려 상처 치유를 위한 순리라고 여기며, 다음 악몽에서의 그를 기대하기로 한다.






그의 첫 번째 바람이 갑작스럽고 당당한 통보였다면, 두 번째 바람은 꿈처럼 가물가물한 기억이다. 정확하게 기억나는 건, 그 대상이 또다시 그의 첫사랑이자, 첫 번째 바람 상대였다는 것. 그리고 알아서는 안 됐던, 몰라야만 했던 그와 그녀의 비밀을 알게 된 것. 그때의 충격이 지나간 이유로, 나는 종종 기억을 잃곤 했다.


충격적인 사실을 마주했을 때 뇌는 그 기억을 무의식적으로 억제할 수 있다는데, 딱 그 수순을 밟은 셈이다. 이러한 현상이 하도 신기해 찾아보니, 내 심리적 고통을 줄이기 위해 생물학적 방어 기제가 발동했고, 뇌의 해마와 전두엽이 관여해 그 기억을 지워버렸더랬다.


가끔 나는 기억나지 않는 부분들을 친구들로부터 듣곤 했다. 가령, 내가 교탁 앞에 서서 남자친구가 바람 폈다는 걸 호기롭게 자랑하고 낄낄 웃었다던가, 이름만 알던 친구에게 다가가 안겨 울었다던가 하는 창피한 행동들에 관한 것이었다. 점점 내가 언제 무슨 행동을 할지 몰라 불안해졌고, 어떤 기억이 잊힐지 몰라 두려워졌다. 그렇게 입시 중에 쓰러져 불안장애 진단을 받았다. 학교생활이 힘들어졌다.


상처받은 마음을 품고, 사라지는 기억을 애써 붙잡으며 자못 힘겨운 시간들을 보냈다. 누구에게도 그와 그녀의 사연을 말할 수 없었던 나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함구해버리고야 만다. 입이 무거운 것도 한몫했겠으나, 무자비하게 그들을 미워하고 싶기 때문에, 나만큼은 사람 된 도리를 하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해야 마음이 좀 낫달까. 아니, 내가 조금 더 성숙하고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같달까. 혹은 그들을 보호하려는 행동을 함으로써 그들의 우위에 있다고 느끼고 싶은 걸까. 오만인 걸까. 오지랖일까. 사람됨일까.


사실 이 모든 건 중요치 않았다.

그냥 모든 게 다 바보 같았다.








작가의 이전글 그의 사랑이 가면으로 보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