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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구왕

“족구하는 소리하고 있네.”

by 권씀

“너 토익 몇 점이야?”

“본 적 없는데요.”

“공무원 시험 준비해. 학점은?”

“이쩜….”

“공무원 시험 준비해.”


과 선배(박호산 배우)의 일갈은 우리가 겪어온 기억의 단편일지도 모른다.

막 제대 후 대학에 돌아간 복학생 만섭은 기숙사 방을 함께 쓰는 과 선배에게 “공무원 시험 준비해”라는 말만 듣는다. 학교의 학생들은 두꺼운 책을 들고 바쁘게 돌아다니고, 영어회화를 가르치려는 외국인 교수에게 “토익 영어나 공부하자”고 한다. 하지만 만섭의 관심은 오로지 족구뿐. 군대 간 사이에 학교에 족구장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서 그는 족구장 건립에 앞장선다. 학교에서는 아무도 족구를 하지 않고, 여학생들은 족구하는 복학생을 호환마마보다도 혐오한다. 학생과 교직원은 그가 족구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이런 반응을 보인다.


“족구하는 소리하고 있네.”

배우들의 시너지가 참 좋았던 족구왕

족구왕은 ‘족구하는’ 청춘영화다. ‘88만원 세대’가 등장한 이후, 청춘영화는 이 세대의 슬픔과 아픔을 이야기했다. 거기엔 기성 세대에 대한 원망, 분노나 자조가 섞여 있었고, 그중에는 신세한탄이나 어리광에 그치는 것들도 있었다. 청춘영화이되 청춘다운 것은 없었다. 그에 비하면 ‘족구왕’은 순도 100%의 청춘영화다. 등록금과 취업이란 문제로 선을 긋고 그 안에서 아등바등하는 영화와 달리 ‘족구왕’은 이 선 밖으로 삐져 나간다. 그것도 격렬한 저항의 몸짓으로 뛰쳐 나가는 게 아니라 ‘어차피 남들이 그려놓은 이런 선 따위야’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폴짝 뛰어넘는다. 애당초 청춘이란 게 이런 것이다.


우리의 지난 시간을 돌이켜봤을 때 이토록 열정적으로 몸을 움직여본 적이 있을까.

만섭은 같은 과 친구 창호와 미래와 팀을 이뤄 교내 체육대회에 나간다. 만섭은 학교에서 가장 예쁜 안나을 좋아하고, 만섭의 라이벌은 안나의 남자친구이자 전직 국가대표 축구 선수인 강민이다. 만섭과 강민, 둘 중에서 체육대회에서 이기는 자가 족구왕이다. 무엇이든 ‘왕(王)’자가 붙은 것은 다 좋지만 족구왕은 예외다. 주식왕, 토익왕, 축구왕 등 ‘왕’으로 끝나는 것들에는 부와 명예가 따른다. 하물며 피구왕은 아이들에게라도 인기가 많다. 족구왕은 예외다. 족구는 잘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이런 면에서 족구는 청춘과 비슷하다. 무용(無用)한 것이고, 돈이 별로 안 들어도 재밌으며, 땀이 날 정도로 열심히 한다.


이 둘은 훗날 가수 '짙은'의 '잘 지내자, 우리' 뮤직 비디오에 출연한다. 둘의 후일담으로 본다면 묘한 기분이 든다.

영화<족구왕>은 평범한 복학생 만섭과 그의 주변 친구들의 빛나는 청춘을 담고 있다.

족구와 연애를 하고 싶은 만섭, 여자친구를 만들기 위해 다시마만 먹은 창호, 부상으로 더이상 축구를 하지 못하게 된 강민, 하고 싶은 것을 뒤로 미루고 공무원 준비를 하는 형국, 만섭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줄 알게 된 안나까지 영화속 모든 인물들은 우리들의 모습과 닮아있다.

청춘. 무엇을 배워도 늦지 않고, 무엇이든 다 해볼 수 있는 나이. 다양한 것들을 경험하며 그 안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껴서 진정한 어른으로 거듭나는 시기. 하지만 우리의 청춘은 어떤가? 늘상 공부와 스펙에 가로막혀 좋아하고 해보고 싶은 것은 하지 못하며, 너무 무겁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청춘이 가지는 가치를 모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당연하게 찾아온 청춘이기에 그 가치를 쉽게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닌지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다 알고 있다. 황금을 버린다는 것은 미친 행위라는 것을. 하지만 그 연장선은 모르고 있다. 황금으로도 살 수 없는 청춘을 버리고 있는 것은 정말 미친 짓임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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