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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

권력의 야비함에 희생된 광대들

by 권씀

왕의 남자는 실패하여 자멸의 길을 택한 두 남자 혹은 두 왕, 광대판의 왕과 현실권력자로서의 왕의 이야기다. 공길과 장생, 장생과 공길 이 두 남자에 대한 이 영화의 묘사는 사려깊고 예민하다.

원작인 김태웅의 희곡 ‘이(爾)’는 연산군의 맘에 들어 권력에 빠진 광대, 공길의 이야기다. 하지만 영화는 상당히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 주인공들의 비중을 바꾸고 이야기를 변형시킨다.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주체를 장생으로 바꿔 실제 기록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끌고 간다. 허구의 인물, 장생의 입을 통해 영화가 말하려고 하는 메시지인 권력에 대한 풍자, 그리고 인간의 욕망과 거기서 파생되는 비극을 말하고 있다. 장생의 거침없는 말은 점점 그 도를 더해 세상에 대한 분노와 울분을 쏟아낸다.


왕의 남자는 원작 연극의 설정과 이야기만으로도 흥미를 돋운다. 동성애 코드와 폭력 등 흥미로운 이야기에 새로 바꿔 쓴 결말까지 더해져 흡입력을 발휘한 빠른 전개가 눈에 띈다. 10여년 정도 지난 지점에 이와 흡사한 속도를 낸 영화가 개봉했다. 설경구, 임시완 주연의 불한당. 불한당은 다음 리뷰에서 다루도록 한다.

연산군을 연기한 배우 정진영

다시 왕의 남자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남사당패 장생과 공길은 인간 이하 취급을 받는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며 한양으로 올라온다. 우연히 그들은 놀이판을 펼치고 있던 육갑 일행과 만나게 되고, 여차저차한 과정을 거쳐 다섯명의 광대들은 연산군과 그의 애첩인 녹수를 풍자하는 놀이판을 벌여 세상의 이목을 끈다. 왕을 희롱했다는 죄로(이른바 괘씸죄이다.) 의금부로 갇힌 장생은 “왕이 보고 웃으면 희롱이 아니니 왕을 웃겨 보이겠다”고 큰소리친다. 재치로 위기를 벗어난 장생 일행은 궁중광대가 되고, 이들은 그 뒤로 궁내에서 펼쳐지는 온갖 암투의 도구가 된다.

왕의 남자를 통해 스타덤에 오른 이준기는 여전히 좋은 연기를 하는 배우이다.

왕은 광대패를 교묘하게 이용해 정적들을 쳐 나간다. 왕의 광대이자 꼭두각시가 된 장생은 더 이상 사람이 죽어나가는 꼴을 보기 싫어 궐을 나가려고 한다. 이야기는 한 판 신나게 노는 광대놀이와도 같다. 놀이가 삶이며 인생이 곧 놀이라는 주제는 연극 뒤에 숨어있는 야욕이나 음흉함과는 별개로 흥분을 더한다. 캐스팅된 배우들도 모두 멋진 연기를 보여준다. 신인임에도 여자 남자 연기를 어색함 없이 해낸 이준기나 카리스마 넘치는 놀이패의 리더 장생 캐릭터를 살린 감우성 역시 강렬한 느낌의 사극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했다.

장생과 연산군이 나오는 씬에서는 긴장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고조된다.

왕의 남자는 연산과 장생으로 대변되는 권력과 예술의 대립 서사이기도 하다. 표면상으로는 왕과 광대의 대결에서 광대의 영혼 곧, 예술이 승리한다. 장생은 “다시 태어나면 왕으로도 싫다. 양반도 싫다. 다시 태어나도 광대가 될 것이다”라고 외친다. 하지만 <왕의 남자>에서 이 대결이 가장 부실하게 그려져 있다. 이 영화에는 장생의 호쾌한 선언적 발언에도 불구하고 예술가의 자의식이 보이지 않으며, 예술 양식에 대한 존중이나 매혹도 없다. 장생은 더 큰 판에서 더 강한 대상을 놀려먹는 것이 광대의 길이라고 믿고 있지만, 광대패의 풍자는 공격적 선언이나 비웃음이기 이전에 고도의 숙련이 요구되는 양식이다.

장생의 줄타기는 선택의 갈림길에 쓰인다. 공길의 성상남 저지, 궁궐 밖의 자유 등.

이 영화의 아쉬운 점 가운데 하나는 뛰어난 광대를 그리면서도 일련의 수련 과정이나 영화 중반부에 광대 선발에 있어 세부적인 과정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장생과 공길이 한양으로 가는 길 위에서 저들 홀로 벌이는 장님 공연은 <서편제>의 진도아리랑 장면을 상기시키고, 경극 장면은 <패왕별희>를 상기시키지만, 이 영화에는 <서편제>와 <패왕별희>가 그렇게 공을 들인 수련 장면이 없다. 시간상 한계점이라 하여도 분명 설득력은 떨어지는 지점이다. 장생의 재능은 처음부터 주어져 있으며 그는 자신의 재능에 대해 한번도 의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변치 않는 자부심을 드러내며 항상 최상의 공연을 만들어낸다.

태생이 광대라 하여도 재능마저 타고나기 쉽진 않다.

경극 공연 대목은 좀 지나치다. 언문도 겨우 익힌 조선의 지방 광대패가 중국 경극 교본만으로 그렇게 짧은 시간에 발성은 촌스럽지만 거의 완벽한 분장과 세팅의 경극 공연, 그것도 그들이 이전까지 한번도 하지 않았던 비극을 만들어낸다. 왕의 남자는 예술 양식의 고유성을 외면하면서 공연들의 인과론적 서사 기능에만 몰두한다. 노상 장님 공연은 장생이 정말 눈멀어 벌이는 최후의 공연을 위해 필요한 장치이고, 경극은 유희적인 광대패 놀이가 연산군 모친의 비극을 다룰 수 있는 그릇으로 부적합하기 때문에 혹은 색다른 구경거리로 선택된 것이다. 이 영화대로라면 경위는 알 수 없지만 장생 일행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공연 예술가들이다.

공길과 녹수의 대립은 어쩌면 왕의 마음을 갖기 위한 서로간의 견제일지도 모른다.

최고의 예술가가 단 한번도 자신의 예술을 결코 회의하지 않을 동안 권력자는 단 한번도 자신의 권력에 매혹되지 않는다. 이 대결은 처음부터 승부가 정해진 싱거운 게임이다. 예술은 늘 최고의 완성에 이르는데, 권력은 혐오와 불안과 광기와 균열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또한 예술가는 공연장에서 외설적인 언어를 사용할망정 사생활에선 한번도 자신의 성욕을 표현하지 않는 도덕주의자인 반면, 권력자는 욕망을 과잉 분사하는 악동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예술을 제대로 묘사하지 않는 만큼 권력도 제대로 묘사하지 않는다. <왕의 남자>에 등장하는 두 광대와 두 권력자는 모두 사실상 자살로 끝맺는다. 이 마지막 장면은 권력과 역사를 동일화해 나쁜 타자로 밀어낸다. 사극의 무대 위에서 그들의 죽음을 응시할 인물조차 남겨두지 않고 주요 인물이 모두 죽는 이 설정은 과격하게 순진한 반역사주의다. 나쁜 역사의 반대편에 갖가지 방식으로 사멸한 남성들의 자기 연민이 있다. 남성들의 자기 연민과 자살은 한국영화의 변치 않는 유혹이다.

장생과 공길의 관계를 그려냄으로 왕의 남자는 하나의 금기를 깨뜨린 건 아닐까.

몇몇 결함들에도 나는 한 인물 때문에 이 영화를 지지한다. 그는 정진영이 연기한 연산군이다. 자기 연민과 자기 혐오, 천진함과 노회함, 광기와 열정, 잔인함과 순진성이 뒤섞인 이 권력자는 한국 사극에서 유례없는 캐릭터다. 자신이 승인했고 사랑한 그러나 자신이 두눈을 빼앗았고 사랑하기를 멈춘 두 광대가 마지막 줄타기 놀이를 벌일 때 천진난만한 웃음이 환하게 퍼지는 그의 얼굴은 오랜 시간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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