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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씀 Feb 22. 2023

아버지의 취미

어릴 때 할머니댁에 놀러 가면 마루 구석에 흰색 천을 덮어놓은 풍금이 있었는데, 기분이 내키면 아버지는 풍금을 연주하곤 했었다. 어떤 곡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투박한 손을 가진 아버지가 풍금을 연주하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참 낭만적이었다. 



결혼하기 전 아버지는 취미도 많았고 여행도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10대 때 학교를 경주에서 다녔는데, 밑의 동생 세명과 함께 자취를 하면서도 취미생활은 놓지 않았었다. 내가 들은 취미만 해도 그림 그리기, 풍금 연주, 작문, 사진 촬영이니까 지레짐작이지만 분명 더 많은 취미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아버지의 취미 일부분이 대를 이어 나에게 넘어온 걸지도 모르겠다.


한창 수출 역군을 배출하던 70년대에 아버지는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공사 현장에서 일을 했었다. 귀국한 뒤에는 집 근처에 표구사를 차려 운영을 하다 여러 차례 선을 본 뒤 어머니를 만나 결혼을 하고 보다 더 벌이가 되는 방향으로 일을 잡아서 누나와 나를 키우셨다. 우리네 부모님이 그렇듯 사는 게 워낙에 바쁘고 팍팍해서 점점 취미라는 단어가 희미해져 간 것 같다. 그저 가끔 손을 풀 겸 가족이나 주변 풍경을 그리거나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인근에 나들이 가는 정도로 위안을 삼으셨던 게 강산이 네 번 가까이 바뀔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요즘 아버지는 다시 그림을 그리고 계신다. 왼손이 불편해서 양손으로 무언갈 하는 건 아직 버거운 상태이고, 한 손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취미가 아무래도 그림이라서 그걸 택하셨는데, 내가 어릴 때 보았던 아버지의 그림이 점점 살아나는 느낌이 들곤 한다. 그렇게 그린 그림이 벌써 스케치북 네 권을 채웠고, 어머니 지인 분께서 그 그림을 보시고선 전시회를 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테니 부지런히 그려두시라고 권유를 했다는 이야기를 얼마 전에 전해 들었다. 


어린 시절 들었던 아버지의 풍금 연주는 이제 어려운 일이 되었지만,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음이 안도감이 든다면 내가 좀 이기적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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