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부모님의 보호자가 된다는 것

by 권씀

부모님 곁을 떠나 떨어져 지내다 가끔 본가를 들르게 되면 부쩍 나이가 든 부모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과 웃을 때 얼굴에 피어나는 주름살. 그리고 손등에 제법 자리 잡은 검버섯들. 괜한 돈을 쓰는 거 아니냐며 타박을 할 때도 있지만 부모님의 늙어가는 모습이 마음에 끝내 걸려 종종 피부과로 모셔가곤 한다. 요즘엔 시술도 워낙에 잘 되어있으니까. 부모님께서 젊은 시절 관리하지 못 한 것들을 이제서나마 보호자라는 그럴 듯한 자격으로 아들 노릇을 하려 한다.


어린 시절 병원을 가게 되면 꼭 아버지와 어머니 중 한 분이 입·퇴원을 챙겼고 병간호도 번갈아 하시곤 했었다. 지금의 내 덩치를 보면 잔병치레 없이 튼튼하게 자랐다고 여기지만, 어릴 땐 비쩍 골아있기도 했고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결코 자랑거리가 될 건 아니지만 어지간한 병원은 다 가봤다고 할 정도로 부침이 심했더랬다. 아주 어릴 때는 인지를 하지 못했지만 커가면서 피부과, 신경외과, 정형외과, 안과, 이비인후과 등 그야말로 병원 투어를 하면서 보호자 위치에 있었던 부모님께 슬슬 눈치가 보였었다. 내가 생각해도 다른 애들은 그 흔한 감기 하나 안 걸리고 학교 잘 다니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부침이 많은 걸까 싶었던 것이다.


초·중·고등학교를 지나고 대학생이 되면서부터는 보호자 없이 병원을 다녔었는데 세 번 정도는 보호자가 필요한 적이 있었다. 군대에서 다쳐서 한 번, 작년에 회사에서 다쳐서 한 번, 얼마 전에는 집에서 다쳐서 또 한 번, 이렇게 세 번을 어머니와 동행을 했었다. 군대에서 다칠 때만 하더라도 어머니도 50대 초반인 나이었던지라 별다른 말씀 없이 챙겨주셨는데, 작년에 이어 올해 수술을 받으면서 부쩍 힘에 부친게 보였다. 사고는 한 순간이라 "안 다치도록 할게요.", "조심할게요."라는 말을 무색하지만, 별달리 드릴 말씀이 없어서 그냥 저 말들을 건넸었다. 병원의 풍경이 대개 그렇듯이 입원 환자도 많지만 보호자, 간병인들도 워낙에 많아서 병원 특유의 흐름에 적응을 하기란 무척이나 어렵다. 환자 본인이야 통증 여부를 제외하고는 그저 치료받고 휴식을 취하면 될 일이지만, 보호자나 간병인의 경우엔 식사 때가 되면 식판을 들고 옮기는 것부터 시작해서 진료 시간과 치료 시간에는 주치의, 간호사 선생님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하고, 입·퇴원 서류까지 챙겨야 하니 그야말로 몸살이 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로 체력 소모가 많다. 그 수고로움과 어려움이 보이기에 다치게 되면 다시 다짐을 하곤 한다. 이젠 다치지 말자고.


아버지 몸이 좋지 않으셔서 부모님과 같이 살 때는 내가 아버지의 보호자로 병원 출·퇴근을 했었다. 장기 입원은 아니지만 짧게 입원을 몇 번 하셨고 그 시기가 지나고서는 일년에 두번 병원에 가시는데 아무래도 거동이 불편하시다보니 주로 내가 연차를 내고 병원에 모시고 가는 편이다. 어머니도 계시지만 매일 아버지를 챙기고 계시기도 하고 힘에 점점 부치는 게 눈에 선하기에, 내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려면 정기 진료 때 모시고 가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렇게 여러해동안 모시고 다니고 있는데 아버지 손을 잡고 병원 내 진찰을 하다보면 내가 어느새 아버지의 보호자가 되었다는 게 실감이 난다. 아버지의 키와 덩치를 훌쩍 넘은 것보다 이렇게 병원 진료를 가는 것으로 보호자 역할을 체감한다는 게 썩 좋은 일은 아니기에 괜히 아버지의 걸음을 재촉할 때도 있다. 부지런히 걸어야 진료 시간에 맞출 수 있노라며. 군말 없이 내 발걸음에 따라오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 또 마음이 짠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걸까.


보호를 받는 입장에만 있다가 보호자가 된다는 건, 특히나 연로하신 부모님의 보호자가 되는 일은 누구나 거쳐야 할 성장 과정이려나. 보호자가 된다는 게 가슴 먹먹하기도 코끝이 시큰하기도 한 거라 누가 알려줬더라면 조금은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오늘도 카피바라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