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이 되면 비로소 여름이 왔음을 느낀다. 잔뜩 달아오른 지면 위로 굵은 빗줄기가 한차례 쏟아진 뒤 어설프게 해가 떴다가 다시 빗줄기를 주륵주륵 내리기를 반복하는데 예상할 수 없는 날씨에 몸과 마음은 지치기 마련이다. 그래. 이건 일기예보에서 말하는 고온다습이다. 가끔은 그 네음절로 된 말로도 부족하리만큼 몸소 느끼곤 하는데 여름이 내뿜는 입김에 몸을 내던진 듯한 기분이 된다. 먹구름과 비구름을 포함해 자연이 버무릴 수 있는 온갖 우중충한 구름을 온몸에 두르고 있다면 이런 느낌일지도.
방금 씻고 나와 구석 구석 닦았음에도 불구하고 땀인지 물기인지 모를 것들이 송골 송골 맺혀있는 걸 볼 때면 체념을 하고야 만다. "그래. 장마철이었지." 라고 말이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장마철에는 습한 공기 탓에 자연스레 선풍기나 에어컨 리모컨에 손이 간다. 습한 공기를 조금이나마 날려보자는 마음에 전원 버튼을 누르곤 하는데, 꿉꿉했던 몸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선선한 바람에 말리곤 한다. 괜히 선풍기와 에어컨을 발명한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말이다.
장맛비가 대차게 내리는 날이면 처량하게 비구경을 하곤 한다. 평소에는 관심없던 화분을 괜히 만져보기도 하고, 한참동안이나 바닥에 눌러붙은 살갗을 장난스레 쩍!하고 떼보기도 한다. 손바닥을 오목하게 굽혀 창문으로 내밀어보는 것은 그만두기로 한다. 미세먼지다 뭐다 해서 괜히 찝찝하니까. 흙냄새 잔뜩 올라오는 빗길를 거닐어 볼까 하다가 그것도 그만 둔다. 나태함이라는 건 이런 장마철에 제격이겠지. 비가 내리는 날엔 날은 곧 어둑해지고 사방에 빗소리만 들린다. 세차게 내리기도 잠시 숨을 고르기도 어쩔 땐 내 맥박에 맞추기도. 이런 날엔 술이 제격일까 아니면 따뜻한 국물 요리가 제격일까. 역시나 밀가루 반죽을 해뒀다가 수제비를 해먹어야 겠지. 오들오들 떨다가 속에 뜨끈한 국물이 들어가면 나른해지기 참 좋거든. 술 한 잔 해도 근사하고. 그렇게 시리고 비어버린 속을 채우면 나른함이 밀려온다. 나태와 나른, 그 중간 어딘가쯤일지도. 슬쩍 벽에 기대 옛 노래를 듣기도 하고 구석에 있던 기타를 집어들고 한 줄씩 튕겨보기도 하다 몸을 뉘여본다.
다시 장마철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