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는 시어머니를 꼬박 40년 동안 모셔왔다. 고부사이가 아무리 편한 들 친정어머니와 딸 같기란 힘든 일이다. 그나마도 요즘 들어 모녀 같은, 친구 같은 고부사이라고 하는 거지. 하물며 홀몸으로 4남매를 키운 시어머니에게 맏며느리는 결코 딸 같을 수 없었으리라. 대구 와룡산 아래 자리 잡은 야트막한 기와집에서 7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난 이모는 당시 군 복무를 하고 있었던 이모부를 만났다. 큰 오빠의 군대 동기이기도 했는데, 휴가 차 대구에 놀러 왔다가 만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을 하게 되었다. 농사를 짓던 농촌에서 뱃일을 해야 하는 어촌으로 간 이모는 그 곱던 피부가 바다 바람에 쓸려 빨갛게 부었고, 뱃일을 하는 이모부 일손 도와주랴, 살림하랴 몸을 참 많이도 썼다. 첫 딸을 낳고 두해 뒤에 아들을 낳고서야 시어머니는 애 낳느라 고생했다는 말을 건넸다.
하지만 고생은 계속이었다. 아이들은 별 탈 없이 커갔지만 시어머니의 잔소리는 더욱 심해졌기에, 차마 친정 동생들에게 바다 구경 오라는 말도 편히 하지 못했다. 아이들이 다른 도시로 대학교를 갈 나이가 되어서야 겨우 눈치를 보며 친정 식구들에게 놀러 오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처제, 처남들 멀리서 왔다고 마당에서 고기를 굽던 이모부는 사람 노릇을 이제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고, 안방에 있던 시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이모를 따로 불렀다고 했다. 남편을 네가 챙겨야지. 누가 챙기냐고. 저런 말이 왜 나오냐고 한 차례 서슬 퍼런 잔소리를 늘어놓았고 친정 식구들이 돌아간 뒤에 한참이나 눈물을 지었다고 했다. 그렇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왕래가 있었다.
시집살이를 한 그만큼의 시간이 흐르고 큰 외삼촌이 임종을 맞이하고서야 다시 이모를 만났다. 전화 통화는 간간히 해왔지만 얼굴을 정말 오래간만에 보는 것이기에 어색했지만, 그런 어색함 속에 슬픔이 먼저 찾아들었다. 이모부의 친구이자 이모의 오빠였던 큰 외삼촌이었기에 영정사진에 절을 하고서 이모부와 이모는 한참 동안이나 일어나지 못했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던 이모는 이제 7남매가 다들 환갑도 넘기고 그래도 볼 법했는데 못 봐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사는 게 바쁘진 않았지만 어른을 모시는 것이 가장 큰 일인 것이라 했다. 이렇게라도 보니 참 반갑다며 웃음을 보이다가 다시 눈물을 짓고 그렇게 이틀 밤을 새웠다.
발인이 끝나고 며칠이 지난 뒤 집으로 전화가 왔다. 한참 통화를 하던 어머니는 "언니, 고생 많았다." 그 말을 되풀이했다. 통화가 끝난 뒤, 어머니의 말을 빌리자면 이모가 시어머니를 요양원으로 모신다는 말을 했다고 하는 것이다. 연세도 연세고 그제 저녁에 시어머니 밥 챙겨드리려고 들어가 보니, 다소 실수를 하셨다고 했다. 올 가을 들어 몸의 기능이 떨어지다 보니 종종 그렇게 됐는데, 이모는 시어머니께 괜찮다며 마실 다녀오시라고 한 뒤에 어지럽혀진 방과 이불을 치우면서 한참 동안이나 울었다고 했다. 환갑이 넘어서도 시집살이를 하고 있는 본인의 신세가 슬픈 게 아니라, 그 깔끔하고 꼿꼿하던 시어머니가 이런 실수를 하는 게 잦아지다 보니 움츠려 드는 게 안타까워서라고 했다. 방이랑 이불은 더러워지면 치우면 그만이지만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고 나서 며칠 뒤 이모는 시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전해왔다. 100세를 한 달 앞둔 날이었다. 이모와 이모부는 상복을 입고 있었고,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며 손을 잡아주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40년의 세월이 심적인 거리를 멀어지게 한 것이다. 이모의 시누이는 어머니 가셨으니 이제 편히 놀러 오시라며 인사를 건넸고 다들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룻밤을 보내고 장례식장 문을 나서는데 이모가 따라왔다. 차비하라며 어머니에게 억지로 주머니에 꽂아준 흰 봉투에는 오만원과 편지가 들어있었다. 이제는 서로 자주 봤으면 좋겠다고.
이모가 40년 만에 마음 놓고 건넨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