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자아를 방처럼 여긴다. 벽이 있고, 창이 있고, 문이 있어 그 안에서 나라는 사람이 머문다고.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 방이 사실은 ‘완성된 구조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벽이라고 믿었던 것은 때로 종이처럼 얇았고, 창은 사라졌다 생기기를 반복했고, 문은 열려 있다가도 금세 흔적 없이 닫히곤 했다. 자아란 지어진 적이 있는 공간이 아니라, 늘 짓는 중에 있는 현장과도 같았다.
누군가는 그 현장에 잠시 들러 작은 사물 하나를 놓고 가기도 했다. 말버릇처럼 몸에 밴 어떤 뉘앙스, 스치듯 지나간 표정, 오래 삭힌 후에야 의미가 드러나는 말들. 그들은 흔적을 남기고 떠났고, 나는 그 흔적을 지우려다가도 어느 순간 그 위에 내 삶을 덧칠하고 있었다. 관계란 그저 서로를 비추는 일이 아니라, 서로를 조금씩 개조하는 일에 가까웠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나를 바꾸어놓은 것들의 대부분은 거창한 사건이나 치명적인 만남이 아니라는 사실을. 오히려 사소한 것들—눈을 마주치지 못한 순간, 말끝을 흐리던 타인의 숨, 서로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 못해 생긴 작은 틈 같은 것들—이 자아를 더 크게 흔들어 놓곤 했다. 크고 선명한 변화는 드물지만, 잔잔한 침식은 매일 일어난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때로 ‘내가 변했다’는 말보다 ‘어쩐지 달라졌다’는 표현을 더 자주 쓰게 된다. 변화는 의지의 결과 같지만, 달라짐은 환경과 관계가 스며든 끝자락에 붙는 말이다. 자아는 그런 식으로 조금씩 수정되고, 일부는 낡아 떨어지고, 또 일부는 예기치 않게 단단해진다. 마치 물결이 돌을 깎아내듯, 꾸준한 마찰 속에서 모양을 갖추어 간다.
어쩌면 닫힘과 열림의 문제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여닫힘을 ‘태도’로만 규정하려 하지만, 실은 그보다 더 많은 것이 개입한다. 몸이 기억한 상처의 모양, 오래된 충격의 잔향, 누군가가 미처 닿지 못하고 멈춰 선 자리와 같은 것들. 자아는 그 모든 과거와 현재의 겹겹 속에서 자연스럽게 틈을 만들고, 그 틈으로 바람이 드나들며 조금씩 방향을 바꾸어놓는다. 완전히 열려 있지도, 철저히 닫혀 있지도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요즘 ‘나답다’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나답다는 말이 과연 존재하는가. 혹은 우리가 그렇게 부르는 것은 수많은 타자와 사건, 기억이 스쳐 지나간 뒤 남은 잠정적 형태가 아닐까. 그 형태는 언제든 수정될 수 있고, 다시 그려질 수 있다. 그러니 나답다는 말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가까운 셈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때로 멈추고 싶기도 하다. 더는 흔들리고 싶지 않고, 더는 달라지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삶은 우리가 멈추기를 바라고 있는 동안에도 관계의 미세한 손길을 통해 우리를 조금씩 바꾸어놓는다. 멈추어 있는 듯 보여도 자아는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한 사람의 세계를 건너며 나의 세계를 고쳐 쓰고, 또 누군가에게 건너가 그 사람의 세계에 작은 흔적을 남긴다. 그런 의미에서 자아란 혼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관계의 경계에서 태어났다 사라지고 다시 생겨나는 일종의 ‘흔적의 집합’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닫혀 있다고 해서 완전히 외부와 단절된 적은 없고, 열려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환대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저 문턱 어딘가에 걸쳐 선 채, 들어오려는 것과 나가려는 것 사이에서 끊임없이 모습이 다듬어지는 존재다.
그리고 그 불완전한 과정이야말로 우리가 계속 살아가게 하는 힘인지도 모른다. 문이 조금 열려 있든, 조금 닫혀 있든, 중요한 것은 그 문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배우며 존재를 갱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