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상 시선

작은 할매

by 권씀

할매는 꽃신 신고 재 넘어왔네

친정이나 시댁이나 가진 것 없는 살림이라

분홍빛 꽃신 하나 신고서 재를 넘어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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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줄 아는 거라곤 노름뿐이던 할배는

그래도 사내구실 한다고 얼라들은 많이도 낳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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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노릇은커녕 남편 구실도 제대로 못하던 할배는

판을 키우고 키우다 결국엔 자기 목숨도 판에 걸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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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모지리 남편 살려보겠다고

할매는 재를 넘고 넘어 나물을 캐다가 팔고

높은 담벼락 있는 귀한 댁에 가서 식모를 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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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돈을 모으고 모아 겨우 데려온 할배는

없는 살림에 술을 퍼다 마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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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라들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도 들은 체도 않고

배냇저고리까지 팔아다 술을 퍼마셨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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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일찍 기울던 겨울날

봄이 채 오기도 전에 할배는

소쩍새 울음 마냥 허망하게 재를 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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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남편이라고 할매는

먼저 가버린 정 없는 할배 제사를 꼬박꼬박 지내면서

얼라들을 참 열심히도 키웠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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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 얼라들은 머리가 굵어지고

할매는 점점 땅으로 땅으로 허리가 굽어가고 있었네

얼라들은 지 살 도리만 생각하느라 그걸 몰랐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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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 자란 집에서 발걸음을 타지로 향하면서

먼 길 발걸음 조심히 가라고 배웅하는 할매 손을

그 누구도 잡아주지 않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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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일곱 번의 손인사를 마치고

할매는 텅 빈 집에서 밤을 지새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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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요, 우리 얼라들 잘 되구로 좀 봐주소."

텅 비어버린 집에서 할매는 그렇게 손이 마르도록 빌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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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 되면 회사 핑계 애들 핑계로

들여다보지도 않는 자식들 잘 되라고

그렇게 셀 수 없는 밤을 빌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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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무심히도 흐르고 흘러

남은 살 날처럼 까맣던 할매 머리 위에는 하얗게 서리가 내려오고

대나무처럼 반듯하던 할매 허리는 소나무처럼 굽어갔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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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이 기도를 드리던 할매는

할배가 재를 넘던 그때처럼 그렇게 재를 넘었네

꽃신신고 넘어온 재를 꽃가마 타고 넘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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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할매요. 우째 그 세월을 살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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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를 꼭 닮은 손자의 치기 어린 투정에도

영정 속에서 할매는 그저 말없이 웃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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